박종우 선배님과 친척 상가에서 구수한 이야기 감사드립니다. 골든 벨 우승 이야기하며 히회이야기 안동 이야기 등등, 다음에 꼭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영주의 "작은 하회" 우리 무섬 마을 이야기 하나 올릴게요.
아도서숙(亞島書塾)
무섬 사료관에서 들려준 아도서숙 이야기는 정말 무섬마을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김한철 교수에 의하면 아도서숙 터는 무섬 윗마을 선성김씨 정자 뒤, 소나무 숲 뒤쪽 넓은 터라고 한다. 일제 때 항일민중교육기관이었는데 한철씨의 5대조 꼬깨할아버지가 큰 기와집을 내어 놓아 사용하게 했는데 일제순경들이 지도자들을 모두 잡아가고 불질러서 타버렸다는 이야기를 하여주었다.
아도 서숙은 무섬 마을의 지주 및 상징이다. 곧 복원예정이다.
해우당자손, 김화진씨가 일본 유학, 동경서 활약하고 귀국, 신간회 등을 통해 배운 후, 마을의 젊은이들과 이웃마을 등 남녀노소, 양반 상놈 가리지 않고, 문맹퇴치,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던 작은 마을 학교다. 산간회 폐지 이후, 독립운동의 본거지 역할도 하였다. 아도 서숙이 번창하자 일제순경 일 부대가 와서 18명의 지도자들을 굴비 엮듯이 잡아갔단다.
무섬마을이 영주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 강점기 때 무섬마을의 공회당이자 주민교육기관인 ‘아도서숙’은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아도서숙을 바탕으로 이 마을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애국지사만 해도 5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무섬마을의 선비정신, 항일독립운동정신의 상징인 아도서숙의 복원이 기대 된다.
경향일보기자 출신 무섬사람 김지영 교수의 신문에 낸 글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아도서숙을 다녔던 김운한씨(89·예비역 소장·서울 거주)가 쓴 <아도서숙기>와 예안(선성) 김씨 문중, 주민 등에 따르면 아도서숙은 1928년 10월 건립됐으며, 1933년 7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숙 될 때까지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계몽사상을 가르쳤다.
해우당의 증손자인 김화진 선생(1904~1946) 등이 중심이 되어 마루로 된 교실과 온돌방 두 개로 된 건물을 짓고 공회당으로 이용하면서 문맹퇴치와 농민계몽,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신간회 영주지회와 영주청년동맹 평은 지부 등의 사무실도 겸하면서 영주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농민운동 및 반제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인 적색농조가 결성돼 그 거점이 되기도 했다.
1932년 7월27일 새벽에는 일본 경찰 1개 소대가 마을을 에워싸고 적색농조 조합원 검거에 나서 무려 18명이 연행됐다. 1933년 7월11일에도 같은 방법으로 인근 물건너 마을 탄산리를 포함, 모두 15명이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
이 마을 출신인 김제균씨(83·수원)는 “당시 마을 어른들이 무더기로 포승줄에 묶여 칼 찬 일본 경찰들에게 끌려가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아도서숙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고취한 무섬마을의 정신적 뿌리”라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가 5명이 있고 아직도 고증을 거쳐 더 많은 독립유공자가 있을 것이다.
무섬마을 아도서숙(亞島書塾)' 이야기

문화재 지정 '조선일보 문자 보급책'으로 공부한 90세 김운한 옹의 회고: 조선일보 2011.10.26 03:09
82년 전 교재 보니 눈물 왈칵 - 당시 멍석 4개 깔아놓은 교실, 30~40명 앉아 가갸거겨 합창
항일운동 아지트 역할 - 선생님들 조선 정세 얘기에 어린 나도 독립정신 갖게 돼
당시 배움터 복원하는 게 꿈 - 고향에 한글교습 기념관 건립, 문자보급 사료 가득 채우고파
"아침 신문 보다가 울었습니다. 내 나이 여덟 살 때 마을 공회당에서 '가갸거겨' 배울 때 봤던 교재를 82년 만에 또 만나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조선일보의 일제하 한글 교재가 문화재로 등록된다는 뉴스가 보도된 25일 아침. 나이 지긋한 독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운한(金雲漢) 예비역 육군 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본지가 문자 보급 운동을 개시한 1929년 7월, 경북 영주군(榮州郡) 평은면(平恩面) 수도리(水島里) 공회당에 차린 한글 교실에 들어갔다는 그는 이제 90세의 백발노인이다. "맞아요. 공회당 교실 양쪽 벽에 붙어 있던 그 한글 교재네요."
직접 만난 그는 조선일보 발행 '한글원번' 사본을 보여주자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시 어린 나이였으니 한글 선생님들이 조선일보 문자 보급 단원들인지 아닌지는 잘 몰랐죠. 제가 공부한 그해가 조선일보 문자 보급 운동 첫해라면 그분들이 맞을 것 같군요. 교재도 바로 이 한글 교재였고." 그의 얼굴 주름은 깊었지만 목소리는 쩌렁쩌렁, 눈빛은 형형했다.
"큰 멍석 4개를 깔아 놓은 한글 교실엔 30~4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기억은 세월을 뛰어넘어 엊그제 일처럼 세밀했다. 나라 잃은 아이들은 몇 시간이고 바닥에 주저앉아 "가갸거겨" 합창을 했다. 국민학교도 안 간 어린애부터 스무살 가까이 돼 보이는 떠꺼머리 총각까지 있었다.
"작은 붓에 먹을 찍어 궁서체로 한글을 쓰며 익혔습니다. 연습지는 모두들 신문지였죠. 갱지 한 장도 귀했던 시절이어서, 여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작은 글자를 쓰고 또 썼어요. 종이 전체가 새까만 먹지가 될 때까지 연습했습니다."
“맞아. 바로 이 교재로 내가 한글을 깨우쳤어요.”일제 때 조선일보의 한글 교재 사본을 들고 80여년 전을 회고하는 김운한 예비역 육군 준장.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그는 두어 달 만에 한글을 깨우쳤다. 많은 게 달라졌다. 편지를 주고받게 된 것도 좋았지만, 집에 배달된 조선일보를 읽을 수 있다는 게 제일 신기했다. "여덟 살 때부터 아흔 살까지 신문을 읽고 있으니, 나는 조선일보 82년 독자"라며 그는 껄껄 웃었다. 김 장군은 일제하 한글 교실의 중요한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서울에서 내려온 그 선생님들, '가갸거겨'만 가르치지는 않았어요. 조선 정세 이야기도 가끔 했습니다.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일본놈들, 이놈들이 죽일 놈들'이라고 말했던 거 기억납니다. 처음엔 무심히 들었는데, 선생님들이 여러 번 반복하니까 어린 나도 '나쁜 일본놈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한글을 배운 마을 공회당은 항일 청년들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아도서숙(亞島書塾)'이라는 교육기관이 이곳에 터 잡았고 1928년엔 신간회(新幹會)와 청년동맹의 평은면 지회가 들어섰다. 1932년, 1933년 두 차례 일경이 들이닥쳐 청년들을 무더기로 붙잡아 간 일을 그는 잊지 못한다. "한글 가르쳐 주던 선생님 중에도 감옥 간 분이 많았다"고 그는 말했다. 김 장군은 일제 말기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광복 후엔 육사 8기 출신 포병장교로 6·25에 참전했다. 개전일부터 3일간 적의 남하를 극력 저지했던 춘천지구 전투를 시작으로 전방만 다니며 적과 맞섰다. 1978년 군복 벗고 직업훈련원 원장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한글을 배웠던 경북 영주군 고향 마을 그 공회당은 지금 헐리고 없다. 옛터에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배움터를 복원해 기념관을 꾸미는 게 노병(老兵)의 꿈이다. "쓸데없는 비석이나 기념패 따위는 세우고 싶지 않아요. 대신 80여년 전 마을 친구들과 읽었던 조선일보의 문자 보급 교재들과 문자 보급 운동 기사들을 기념관 벽에 가득 도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