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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문화권역1박2일투어

청량리 역에서 08시10분에 출발하는 안동행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낭만적인 여행을 하면서,

12시16분에 안동역에 도착 좌측으로150여메타 내려가서 시내버스정류장에서46번 하회행 버스를이용

하회마을 매표소 입구에 하차하여서010-8588-9925에전화하시면  문화해설사인 유영일님께서

여러분을 반겨 맞이하실것 입니다,우선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했으니 하회마을 입구에있는 옥류정 식당으로가서

안동찜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나서,하남 예술관에 들려서 하남 류한상선생님 개인소장품인

수준높은 작품들을 보시고,

수요일,토요일,일요일 오후2시부터1시간동안 진행하는 하회탈춤 공연을 보고,

우리나라 고건축물중 가장 아름답다는 병산서원 만대루에 올라서,

당나라 시성 두보가 지은 시 백제성루에서 따온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절벽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녁이 마주대할만하고,"

만대루에서 푸른절벽을 바라보고, 아비에게 효도하는 방법을 바르게 가르친다는 입교당에 올라서는

만대루 기둥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세속에 때묻은 마음을 씻어네고,

평생을 두고보아도 좋을 기념촬영도 몇장 찍고서,

다음은 낙동강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세워졌다는 겸암정사에 들려서

옛선비들의 정취를 느끼며,가르침을 본받고부용대 정상에 올라서는 한눈에 하회마을을 내려다본후

마을로 들어와서 회암초당이나 초목암에 여장을풀고,

안동간고등어 정식으로 저녁을들고 만송정 솔밭으로 나가서 저녁산책을 즐기고,

하룻밤을 보낸후,새벽공기를 마시며,못다본 옛정취를 눈에 가득담고와서주무신후

한정식으로 조반을 들고나서,600여년에 역사가 살아서 숨쉬는 마을안에있는 양진당,충효당,

영모각,삼신당 노거수,북촌댁,하정재 감실등을 두루살펴본후,

나룻터에가서 배를 타고 강건너 옥연서당에 들려서는 임진왜란을 발란극복하신

서애류선생께서 45세때 쓰셨다는 옥연서당기 해설을 듣고,건너오는길에 부용대 절벽아래를 지나며

사진도 몇장남기고,하회마을을 작별하고 나오는길에 웰빙식으로 점심을 드시고,

하루에10회운행하는 46번시내버스를 이용 안동역에도착해서 17시05분발 청량리행 무궁화호를

타시는것으로 투어를 마감하시면 되겠습니다.

 

회원수는4명이 한조이며 수시모집입니다,

안동문화권역 1박2일코스 회비는

 성인 1인당25000원,   소인 1인당2만원, 

 숙박비, 동행안내료가 회비에 포함되어있습니다, 

 문화해설사인제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안내 들이며 사진도 10매정도 찍어서 메일로 보내 들입니다.

탈춤공연은 수요일 토요일과 일요일만 공연합니다,

예약을 원하실경우 

입금계좌 : 농협707118-56-061355예금주 유영일


문의전화 : 010-8588-9925

입금과동시에 자동예약되며

일정을 잡아두겠습니다. 

1) 병산서원

1978년 사적260호로 지정되었으며 고려중기부터있던 풍산류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을 모체로 건립되었습니다,본래 풍산에있었는데 1572년(선조5)에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서당을 현위치로 옮기고 병산서당으로 개칭 그후 임진왜란때 소실된것을 1607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1613년(광해군5)에 서애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1563~1633)등 지방유림이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하여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향사의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되었습니다,그후1662년 수암 류진(1582~1635)이 추가배향되었으며 1863년(철종14)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고,고종때 훼철되지않고 존속한 서원과사당 47개소중 그 한곳입니다.

서애는 이황 선생으로부터 성리학을배운 선조때의 문신이며,정언,대사간,대사헌,대사성,도승지,경상도 관찰사,대제학,병조판서,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을역임,임진왜란때는 선조를 호종하여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데 크게 공헌 했으며,이순신,권률 등을 등용하여 임진왜란을 역전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서애는 1598년(선조31)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징비록 등을 집필 했습니다,

<징비록>은 우리역사상 가장 위급했든 국란을 이겨낸 구국의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다시는

이나라에 이러한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후세에 알리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시경 소비편에 "미리 지난일을 징계해서 뒷근심이 있을것을 삼가한다"고한 구절에서

따온것 이라합니다,

서애선생은 하회마을 앞 낙동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 있는 옥연서당 원락재에서 징비록을 썼습니다,선생의호 서애는 서쪽에있는 언덕이라는 뜻인데,해마다 여름이면 큰물이 들어서 그때마다 서쪽 언덕에 부닦친 물이 얕은 구렁으로 바로 넘어가서 마을은 언제나 보호가 되었는데 바로 그언덕을 자호로 삼았고,임진왜란때엔 자신의 역활이 서쪽 언덕처럼 나라를 구하는데 일조 했다 합니다,


 

해 뜨는아침 병산서원 전경입니다,  

ㄱ) 復禮門(복예문)

서원의 정문입니다.본래 만대루 동쪽에 있던 대문을 1921년에 이전하여 중건한 정면세칸,측면한칸 규모의 소슬대문입니다,복예는 <논어>안연 편에나오는 "克己復禮爲仁"에서 따온 말 입니다,"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라는 이뜻은 곧 세속적인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입니다,예란 곧 질서이며 아비에게는 孝로서 예를갖추고 연장자에겐 공경(敬)함으로 예를 갖춘다 고합니다.

   
 

ㄴ)晩對樓 (만대루)

자연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윗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 기둥들이 정제된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유학의 꼿꼿하고 청청한 맥이 동시에 아래,위층 건물에 살아나 있는듯 합니다,만대는 중국 당나라 시성 두보의詩<白帝城樓>에나오는 翠屛宜晩對 "푸른절벽은 오후늦게 대할만하니"에서 따온것이나 "병풍같은 푸른 산기운에 취해 늦도록 편안하게 마주 대할만 하다" 라고도 합니다,이 만대루는 유생들이 휴식도하고 풍광을 보며 詩會를 가졌든 곳입니다,앞에있는 작은연당<광영지光影池>는 방형의 연당속에 원형의 작은섬이 조성되어 있습니다,이것을 방지원도(方池圓島)라하며 주변에는 사철 청청한 대나무가 식재되어 있습니다,

백제성루(白帝城樓)    두보

강도한산각(江度寒山閣)   강은 차가운산 전각을 지나고,

성고절새루(城高絶塞樓)   성은 아득한 변방 누각에 높다,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절벽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녁이 마주할만하고,

백곡회심유(白谷會深遊)   흰바위 골짜기는 여럿모여 즐기기 좋구나,

급급능명안(急急能鳴雁)   울줄아는 기러기는 빠르디 빠르고,

경경불하구(輕輕不下鷗)   내려오지 않는 갈매기는 가볍디 가볍다,

이릉춘색기(夷陵春色起)   이릉에 봄빛이 일어나니,

점의방편주(漸擬放扁舟)   점점점 작은배를 띄워볼까하네.


 

만대루,병산서원,입교당,등현판3개를 한눈에 보실수있습니다.

  

소낚비가 그친뒤라 방지원도는 물에잠기고 대나무는 더욱 푸르기만합니다.
 

 河南 柳漢尙 님의 작품입니다.

竹者何哉乎(죽자하재호) 대라는것이 무엇인고하니, 其本固(기본고) 그 근본은 굳고(단단하고), 其莖直(기경직) 그 줄기는 곧고(바르고), 其心虛(기심허) 그 마음은 비었으며, 其節堅(기절견) 그 마디는 견고하고, 其行直(기행직) 그 행실은 바르고, 其氣淸(기기청) 그 기운은 맑고, 經霜雪而不고(경상설이불고) 서리와 눈을 맞고도 얼지않는것을보면, 可以爲人法(가이위인법) 가이 사람이 본 받을법하다.

河南 柳 漢 尙 先生 作


 

대(竹)라는것은, 그 근본은 굳고,그 줄기는 곧고,그 마음은 비었으며,그 마디는 견고하고,

그 행실은 바르고,그 기운은 맑고,서리와 눈을 맞고도 얼지 않는것을 보면,선비가 그와같이

본 받을법 하다,하여 옛 선비들은 자연을 의인화 하여,주변에 가까이 두고 심성을 다스렸다 합니다,


 

못에 연을심은 이유는,염계 주돈이 선생(1017~1073)께서 지으신 詩 애련설에서 본받아

연꽃의 이미지를 통하여 군자의 고고한 삶을 지향했다 합니다,
 

 연은 더러운 진흙에서 자라지만 깨끗함을 지닌것이 선비의 이미지를 닮았다 하여,한평생 알아주는이 없어도 저 홀로 은은한 향기를 발하듯 속세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히 살아가는 군자의 삶을 본 받고자 함이라 합니다,동재와 서재앞에 매화나무가 각각 한구루씩 식재되어 있는데,매화는 일평생 춥게살지만 그러나 그 향기만은 팔지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하여 선비의 고결한 기상을 자연에서 터득하게 하기위함 이라합니다,

  

만대루에 올라서 병산을 바라보면 절로 시가한수 나올것 입니다,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四時) 가흥(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늬 그지 있으랴
   

          

봄바람에 꽃은 산에 가득 피어 있고,

가을밤에는 달빛이 누대(樓閣)에 가득히 비쳤으니
춘하추동 사 계절이 각기 지닌 멋은

사람의 흥겨워함과도 다를봐가 없구나!
그러니 더군다나, 고기가 물에서 뛰놀고 소리개는 높이 날며,

흘러가는 구름은 그림자를 던지고,

밝은 햇빛이 온 누리를 비추는

저 대자연의 아름다운 조화에 어찌 한도가 있을 수 있겠느냐?

퇴계선생께서 지으신 詩 도산12곡중 전6곡 6수 雲影天光입니다,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곳 못왔더니,     백발이된 오늘에야 만대루에 올랐구나,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펼쳐있고,     강물은 소리내며 밤낮으로 흐르누나,

지나간 모든일이 말을타고 달려온듯,     우주간에 내한몸이 오리마냥 떠있구나,

백년동안 이런경치 몇번이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벌써 늙어있네.
 

김삿갓 의시 안양루에올라 에서 인용해서 한수올립니다. 

 草牧  柳 永 一

  


 ㄷ)立敎堂(입교당)

스승의 가르침을 받든 강학당 입니다.중앙은 강학당,동쪽은 명성재,서쪽은 경의재,모두 세칸입니다,明誠齋는 학문을 밝게 이룬다는 뜻이있고,敬義齋는 남을 공경하고 의리를 지킨다는 뜻이 있습니다,경의재 안에는 서창이 있는데 하회 남산에있는 삼태봉을 바라보기 위함이고,


 

삼태봉은 세분의 정승을 탄생시킨다는 전설을 가진터라 인재를 배출코져 배우는 학동들로 하여금 매일 바라보게하여 희망을 갖도록 하였다 합니다, 
 

희망은 내것이 되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나 가질수 없으나, 누구나 가질수 있는 희망! 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이 희망을 미루는 사람은 평생을 자기것으로 소유할수 없다는 사실 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방법을 바르게 가르친다는 뜻을가진 입교당은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병산서원의 중심 역활을 하는곳 입니다.
 

서애선생 께서는살아 생전에 이곳에서 후학과 동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식견이 부족하면 큰일을 하지못할것이며, 재주가 골고루 미치지못하고 한정되어 있으면 사리에 통달하여 활용할줄아는 학자가 될수없다"고 말씀하셨고,

"책이나 읽으며 글자 풀이나 한다고 해서는 선비라 할수없고,최소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하게 해줄 치국안민 능력이 있어야하고,오랑캐를 물리치고 재용을 넉넉히하며 문무를 겸해야만 참된 선비라 할수있다" 고 말씀 하셨다 하며

"학문에 익숙하지 못한 덜된선비,부폐한선비,더러운선비,험이 많은선비,도둑질을 일삼는선비,돈이나 밝히는 천한선비,적은것에 탐을내는 속된선비,매사에 트집이나 잡고 남의 험담이나 일삼는 쓸데없는선비,등을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못된이름의 선비라며 삼가하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천문,지리,수학,의술,병법,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겸비 하셨다합니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입니다.


 

ㄹ)尊德祠(존덕사)

   

서원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서애 류성룡 선생과 그의 셋째아들 수암 류진 공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1610년(광해군2)우복 정경세 공을비롯 사림들이 서당안에 존덕사를 세우고 1614년(광해군6)에 선생의 도학과 훈업을 흠모한 나머지 선생의 위판을 봉안함으로서 서원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세째아들 류진 공을 1662년(현종3)사림에서 추가로 종향하였습니다,

광해군6년에 주향,광해군12년에 여강서원(숙종때 호계서원으로 사액)으로 옮겨 모셨다가

1629년(인조7)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와 주향하고 있습니다.

1620년(광해군12)에 여강서원에 퇴계선생의 위판을 모시고 선생의 큰제자 서애,학봉,두 유현중에 어느분을 상석인 왼쪽에 모시느냐가 문제였습니다.

학봉 측에선 "향당은 막여치"를 주장하여 4살위인 학봉을 상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서애측은 "조정의 막여작"을주장 관직이 영의정에오른 서애를 상위에 두어야 한다고주장

함으로서 팽팽히 맞섰습니다.그래서 양측은 당시 상주에 있는 우복 정경세 공에게 위차의 재정을 받기로 했습니다,공은 고명한 성리학자로 이조판서,대제학을 역임했고 왕자의 사부까지 지낸 국가의 원로 였습니다,영남학파의 최장노로서 널리 존경받고있던 사람입니다,


 

우복 정경세 공은 재정에서 <두선생의 년치 차는 견수(년장자와 함께갈때 조금뒤에 떨어저서

따라 간다는뜻)에 미치지 않고 작위의 차는 절석에 있다>라고 말하고 서애를 상위인 좌측에 학봉을 하위인 우측에 모시도록 했습니다,학봉측은 거역할 명분이 없자 일단 승복했습니다, 


 

그로부터 약200년뒤인 1805년 영남유림에서 서애,학봉,한강,여헌등 4현의 위패를 서울 종묘에 종사키위해 청원을 할때 상소장에 서열문제,1812년 대산 이상정의 위패를 합사하는문제,대산유고의 출간분쟁,묘우내의 위패이동설분쟁,등 조정에서도 해결을 못하고 1629년(인조7)에

서애는 다시 병산서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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