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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600여년전에 고려말 공조전서를지낸 류종혜공께서 풍산현 상리(현재 경북도청 북부청사 있는자리)에서 부락을이루고살든 풍산류씨 문중을 이끌고 이거해온 이후 지금껏 내려오는 역사와 전통이깃들어있는 마을입니다.
당시에 이미 김해 허씨들이 웃 하회 거먹실에 터전을잡고 살고있는지가 280여년 되었고
또 경기도 광주 안씨중 평양감사를지낸 안성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에둘러 수려한강산에취해 이곳으로 옴겨와서 지금 연화사(절)있는곳 향계골에서 터전을잡고 살고있었으므로 높은자리는 남아있지 않았고 강바닦에 가까운 숲이우거진 벌판만 남아있었습니다.
삼대째 문중을 이곳으로 이거할 뜻이 있었으나 홍수가나면 곧쓸어 버릴겄만같아서 슆게 결정을 못하고있던중 전서공께서 홍수때 ,가물때,평상시,산에올라서 관찰한결과 강물이 흘러오다가 90도꺽이면서 좁아진것을 보시고 아무리 큰물이 지드래도 그 너른 풍산들을 먼저채우고 일정한 물만이 동래를 통해서 내려간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고 옮겨오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600여년전에 전서공 류종혜 공께서는 풍산 상리에서살고있던 풍산류씨 문중을 물이굽이쳐흐르는 하회마을로 이거를 하게되는데 바로이곳에서 관찰하신결과 큰물이 내려오다가 90도로 꺽여지면서도 강폭이좁아져서 뒤에보이는 풍산들을 다 매우고나서 일정한량의 물만이 동내를 흘러내린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고 옴겨오셨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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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600여년전에 전서공 께서 화산봉에올라서 홍수때, 가물때 평시에 마을에 어떤영향을
미치는지를 여러번 검토하고 문중을 옮겨와도 좋겠다 작정한다음 숲에있던 나무를 베어서 입암고택을
건축할때 재목으로 썼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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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건물을 지을때에 여러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기둥을세우고 지붕을 언즈면 이유없이 기울고 쓸어저서 고심하던중에 스님이와서 말하기를 천년세거지를 시작하면서 공도 덕도 닦지않고 시작했으니 무슨일이 잘될까보냐하며 만인에게 베풀고와서 지어보라 그리하면 잘지어 질것이다.
그리하여 하든일을 중단하고 고개밖에나가서 정관사 라는초막을 지어놓고 오며가는 사람들에게 노자도주고 잠도제워주고 먹여도주고 했으나 그숫자가많치않아 언제 만인에게 베풀것인가싶어서 참외농사를지어서 이웃동래를돌며 나누어주는등 3년이지나고 이만하면 지어도 되지않겠나하고 하던일을 다시시작하여 완성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약600여년이 되었다합니다.
우선 이마을은 국보가 두개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국보121호인데, 고려때 허씨들이 이곳 거먹실에 부락을 이루고 살때에 괴질이돌아서 많은사람들이 알아눞게되자 고심하던중 허도령이잠자는데 꿈에 계시를 받았는데 "잡인이 출입을 못하도록 깊은산중에 들어가서 금줄를치고 12개의각기다른 신분의 탈을만들어서 춤을추되 양반은 재반비용만 부담하고 관여하지말고 그날춤출때에는 어떤행동을 하드래도 탓하지말아야한다."해서 양반은 일채 관여치안은 상태에서 춤을 추게되니 괴질은 씻은듯이 나았다고하는데, 그때 허도령을 사모하던 무진생 의성김씨 규수가있었는데 몇달동안 소식조차 없으니찾아 해멘끝에 금줄을넘어 문구멍으로 들려다 보았는데 이메탈의 턱을깍든 도령이 긴장이 풀려서 그자리에서 피를토하고 죽고말았다 합니다.그래서 이메는 영원히 턱이없으며 그 규수역시 그일후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죽은지라 동래에서 신(神)으로 받들게되었고 지금도화산중턱에 서낭당이라는 당집을 지어놓고 신주를 모시며 음력 정월 열나흘날 국시당으로 옴겨와서 음력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600년묵은 삼신당 노거수 아래(하당)에서 동제사를 올립니다.
그 탈은 오래나무로 만들었으며 옷칠이 되어있었고 동사 함 속에 보관되어있었는데 700여년동안 잘보존된것은 탈 을만지면 탙(사고)난다하여 아무도 번접하지 않았고 행사를치른후엔 향나무 삶은물에넣어서 소독을 해두었기때문에 보존이잘되었었으나 외정때 일본인들이 12개중3개(별채탈,총각탈,떡달이탈)를 가져갔기 때문에 9개가 남아있었습니다.
양반,선비,중,각시,할미,백정,이메,초랭이,부네탈등이 있으며 이메는 턱이없는 영원한 미완성작 입니다.
하회탈은 처다보면 하늘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짓고,아래로 내려다보면 입을꾹다물고 화를낸듯하며, 한쪽옆모습은 주름살이 3줄인 젊은상이요,다른한쪽은 주름살이 7줄인 늙은상을 하고있어서 고정된물채인 탈이 喜怒哀樂(희노애락)의 표정변화가 이루어지는 탈은 보질못했으니
틀림없이 귀한보물이다하여 향리출신 河南 류한상님께서 관계 학자분들을찾아 여러모로 애썻으나 관심밖이라 애를태우던중 1954년 대구에있는 미국문화원문화담당관 맥터카드(Arther Joseph Mactaggart) 박사께서오셔서 보여드리고 말씀드렸는데 세상에 이런귀한 보물이 어디있나 하며 잡지에 귀고하였고 그내용을본 문화재 당국에서 기별이와서 탈좀가저오라해서 그당시동장 류석호 님이 보제기에 싸들고 문화재청에갔다보였는데 두고가라하더니만 국보121호로( 병산탈2개포함)지정이 되었습니다.
국보132호 징비록
西厓 柳成龍 선생(1542~1607)이 영의정 에서물러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술한
임진왜란(1592~1598)의 친필회고록이다. 懲毖(징비)란 지난날을 징계하고(懲),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한다(毖)는 뜻으로 시경 주송 소비(詩經 周頌 小毖)에서 따온것이다.
西厓 先生의 懲毖錄 序文(서애 선생의 징비록 서문)
懲毖錄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후의일을 기록한 것이다.거기에 임진란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것은 임진란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아! 임진란의 전화(戰禍)는 참혹 하였다.수십일 동안에 삼도(三都)를 지키지 못하고 팔도(八道)가 산산이 깨어졌으며,임금께서 피란을 하셨으니 그리고서도 오늘날이 있게된것은 천운이다.또한 조종(祖宗)의 어질고 후한 은혜가 백성에게 굳게 맺어져서 그들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으며,임금이 중국을 섬기는 성심이 황제를 감동시켜 명(明)나라의 원군(援軍)이 여러번 나온 때문이 었으니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내 지난 일을 징계(懲)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毖)하노라.'고했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저작한 까닭이다.나같이 불초한 사람이 어지러운때에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 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밭을수 없을것인데 오히려 전원(田園)에서 목숨을 붙쳐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으니 이 어찌 임금의 관대하신 은전(恩典)이 아니겠는가!
걱정이 조금 진정되매 지난일을 생각하니 황송하고 부끄러워 용신(容身)할수가 없다.이에 한가로운 틈을타서 내 이목(耳目)으로 격은 임진년(1592)으로부터 임술년(1598)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대략 기술하니 이것이 얼마가량 되고 또 장(狀), 계(啓), 소(疏), 차자(箚子), 문(文), 이(移), 雜錄을 그뒤에 부록 하였다. 비록 보잘것이 없지만은 모두 그당시의 사적임으로 버리지 않고 두어서 이것으로 내가 田園에 있으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고 또한 어리석은 나의,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는 것이다.
李載浩 敎授 譯
선생께서는 57세때 임진왜란이 끝날무렵 마지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운명하든날 1598년12월5일, 명나라에 진주사로 다녀올것을 재의받고 노모가93세라 먼길은 갈수없다하여 거절하였다 하여 북인들에의하여 왕명을 어겼다는 죄로 모든 관작을 삭탈 당하시고 향리로 내려 오시든도중에 도미진 나루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 네번 절 하시고 떠나실때 그 심경을 일절 詩로 읋은것입니다.
田園歸路三千里(전원귀로삼천리)
전원으로 돌아가는길 삼천리
惟偓深恩四十年(유악심은사십년)
主上모신 40년 恩寵(은총)도 두터웠소
立馬渡迷回首望(립마도미회수망)
도미진 나루에서 말세워 뒤돌아 보니
終南山色故依然(종남산색고의연)
남산의 빛과 모습은 옛 그대로 일세
서애집 1권 에서 발취하여 옮김
남한강의 배를타고 향리로 내려오시던도중 월악산자락에있는 운암장(서애선생 장구지소)에둘러서 운암잡록을 지으시고 이듬해 2월에 하회 옥연서당 원락재에 거처하시며 다시는 이런 낭폐스러운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지난일을 회고 반성하여 뒷근심이없도록 삼가한다는 뜻에서 징비록 저술을 하셨다합니다.
이마을엔 불천위(영원히모시는)제사가 여섯분이 계십니다.
서애선생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어서 잊어버릴번했든 나라를 다시찾은 공이있다하여 재조산하공 이라하여 나라에서 왕이 지시하여 국천으로받았고, 입암공, 겸암공, 귀촌공 파산공 수암공,등 다섯분은 지역유림께서 훈업을 기리기위하여 후세에 남길귀감이 된다하여 추천하여 조정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오늘에 이르도록 모시고 있습니다.
입암고택
보물306호 양진당 입니다.공조전서 류종혜공께서 벼슬에서 물러나서 육백여년전에 벌판에서자란 나무들을 베어서 일부제목으로 사용하여 우여곡절끝에 지었다는 집입니다.550여년전에 하회마을 최초로 지어진 집입니다.애초엔 당호가 없이 큰집으로 불렀으나 150여년 후에 서애선생 서거후에 후학및 지역유림 에서 충효당 안채를짖고 나서 당호를 충효당 이라 붙이자 그당시 주손 류영 공의 호를 따서 양진당 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근자에 와서 문중회의를 거처 입암 류중영공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 으로 부르는것이 좋겠다하여 당호로 쓰게 되었습니다.고려말 형식에 이조초기에 지어졌으며 안채는 50여년후에 지어졌다하며 안채일부가 임진왜란때 일부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 하며, 사랑채 에서 안채로 통하는 문 이있어서 기존양반 가옥 과는 다른면모가 있다고함니다.
입암고택 옆에있는 일간문을 들어서면 두채의 사당이있는데 높은사당엔 입암류중영공의 불천위를 모신사당이고, 낮은사당엔 겸암류운용공을 모신사당입니다.
대문간채에는 들어서면옆에 말을먺이든 마구간이있는데 말은두마리인데 죽통은세개있습니다,이것은 그집에오신 손님이타고오신 말을먹이기 위함이라 합니다.
사랑채에 붙어있는 안채에 들창문이 있는데 그방은 종부가 거처하는 방이온데 사랑에서 인기척이나면 어떤분이며 몇분이나오셨는지 어떤대접을 해야 마땅할런지 등을보기위하여 종부께서 들창문을 열고 살짝보다가 손님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벼락같이 닫는다해서 벼락문이라 했습니다.
양진당 안채
기둥은 둥근 두리기둥이고 집구조는 안마당이있는ㅁ자형을갖추고있으며,안마루에는 선반위에 개다리 소반이 여러개 언처있는데 손님숫자데로 독상을 차려가기위함이고, 김치독은 추녀아래 땅에묻어서 주둥이만 나와있으며,안마루에서보면 출입문위 기와지붕위에 문필봉 꼭대기부분만 봉그랗게 보이는데 지을때에 풍수지리에맞추어서 문장이뛰어난 자녀가 탄생토록 하기위하여 그리하였다합니다.임진년 왜란이있을때 부억쪽으로 일부화재를 보았으나 복원 하였다 합니다.사랑마당에서 들어오는 문이있는데 문이열려있드래도 안채에있는것이 보이지않토록 벽을내다만들어 쌓습니다.향배는 정 남향입니다.
충효당(忠孝堂)
보물 414호 충효당 입니다.
서애 선생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벼슬에서물러나서 옥연정사에서 거처하시며
국보132호인 징비록을 집필하시고 학가산 기슭에있는 서미동에 삼간초옥(농환재)
을 지으시고 말년을 보내시다가 66세의 생을마감하셨습니다.
사당조차 세울수 없어 지역유림들이 후학들과 힘을 합처 선생의 손자를 도와 사당과 안채을 지어 충효당이란 당호를 쓰게되었고 증손자 대에와서 사랑채를 증축하고 8대손 일우
류상조 공이 순조때 병조판서를 부름받고 대문간채를 지었다합니다.
충요당 대문간채 입니다.
충효당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사랑대청위에 당호 현판이 붙어있는데 숙종때
우의정 을지낸 명필 미수 허목 선생의 전서채로쓴< 충효당> 이란글씨입니다.
선생은 주역에 해박한식견이있어 육효를풀이하여 쓰신글씨라 충자는 옥편에도
없는글씨이며 선생의 글씨가 붙어있는곳엔 재화를 입지않는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선생은 백호 임제 선생의 외손자이며 , 오리 이원익 선생의 손서 이기도합니다.
태어날때 손바닥에 글월文자를 손금으로 세기고 태어나셨다하며,전서채 글씨는
동양 제1인자란 찬사를 받고있습니다.
朴正熙 大統領의 親筆懸板입니다.
永慕閣(영모각)
1965년9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文忠公 西厓 柳成龍 선생의 遺物保存館을 建立하여 선생이남기신 모든문헌과 유물을 일반에게 공개하라는 말씀과함께 건립비의 일부를 정부에서 지원하도록 조처한데 힘입어 경상북도와 안동군의 보조금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1965년9월에착공 1966년 6월11일 처음으로 유물보존관 개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날 박대통령은 청와대 담당비서관을 보내어 永慕閣이란 親筆懸板을 달게하였고 간곡한 취사도 주셨습니다.그후 이건물이 너무 협소하고 시설이 미비하여 귀중한 유물을 보존하기 어렵게 되었음을 전해들은 육영수 여사께서 재건에대한 각별한 배려를 해주셔서 다시 신축된 永慕閣은 57평의 건물이며 1973년5월착공 1975년10월에 준공되었는데 설계와 시공은 국비로 기타시설은 안동군비와 후손들의 성금으로 마련되어 1977년6월9일에 개관,유물들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임진애란에 위급한 우리나라는 명 나라에 원군을 청하게 되었고 , 이여송(唐將 李如松)은 원병을 이끌고 왔다. 전쟁터에 특히 원군(援軍)의 행패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데,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서애 선생이 임진년 (壬辰年) 12월 명(明)나라 제독(提督) 이여송을 안주(安州)에서 마중을 하게 되었는데 이여송은 아무말도 없이 오만방장한 자세로손을 내 밀었다 한다. 이에 서애 선생이 도포자락에서 평양탈환을 위한 작전수의서(作戰搜議書)를 내밀었더니 크게 놀란 이여송이" 조선은 적지만 인물은 크다 "고 감탄 하면서 들고 있던 부체에 시 한수를 써 주었다 한다 .당장제시선(唐將題詩扇)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여송의 5대조는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사람으로 성주이씨(星州李氏)의 후예라 하며 ,당시 조선 주둔중에 조선인 부인을 맞아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경남 거제군에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한다.
1592(선조25)년 임진년12월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안주에서 서애선생과 평양성 탈환을 협의한후 부채앞면에 시를써서 보내왔는데 그시는 이러하다
堤兵星夜浚江干 (제병성야준강간)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취해 강을 건넌것은,
爲說三韓國未安 (위세삼한국미안) 삼한나라가 편안하지 못한때문일세,
明主日縣旌節報 (명주일현정절보) 명황제 께서는 날마다 승전보 오기만 기다리시니,
微臣夜釋酒杯歡 (미신야석주배환) 미신(이여송)은 이 밤에도 술잔 줄기는것도 중지 하였다네,
春來斗氣心逾壯 (춘래두기심유장) 봄철의 북두성 기운에 마음은 더욱 용맹한데,
此去妖분骨已寒 (차거요분골이한) 이로부터 왜적들은 뼈가 벌써 저리겠구나,
談笑敢言非勝算 (담소감언비승산) 담소 하는것이 어찌 승산아니라 말하겠는가,
夢中常憶跨征鞍 (몽중상억과정안) 꿈 속에서도 항시 싸움터에서 달리고 있음을 생각한다네.
西厓 柳成龍 先生 영정

서애 류성룡 (西厓 柳成龍) 선생약력(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풍산. 자 ,이현(而見). 호, 서애. 시호, 문충(文忠)
출생(1542년 중종37년 음력 10월1일) 풍산 류씨 류중영(황해도 관찰사)의 둘째 아들로 의성 사촌(義城 沙村) 외가에서 태어 났다. (사촌에서는 출가한 딸들은 친정에 와서 출산을 허락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그것은 사촌에서 큰 인물이 날 터인데 딸네들에게 빼앗길까 염려 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에 선생 모친 안동 김씨 부인이 만삭이 된 어느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부인은 친정집에 가서 해산을 하면 그 아기가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현몽을 했다. 깜짝 놀란 부인은 집안 어른께 꿈 이야기를 하고 친정길을 서둘렀다. 그러나 김씨 부인이 친정집에 들어서자 친정 부친 진사 김광수 (金光粹)는 낌새를 눈치 채고 딸을 문전 축출해 버렸다. 할 수 없이 눈물을 먹음고 돌아선 부인이 마을 앞 송림에 이르렀을 때 진통이 일어 만부득이 가마 안에서 해산을 하는 고통을 치렀다. 이때에 의성 골짜기의 물이 잠시 동안 말라 붙었고 외갓집의 수백 년된 소나무가 일시 생기를 잃었다는 전설이 있다.)
결혼(1558년 명종13년) 17세 광평대군(廣平大君) 5세손 이경(李坰)의 딸과 결혼
학문 비교적 때묻지 않고 보수화되지 않는 신진 사류에 속한 청렴 강직의 가풍 속에서 조부 및 5촌 아저씨 柳景深. (중종때 사간원 대사간)의 가학(家學)을 이어 받아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 하여 4세에 글 읽기를 시작하여 8세에 대학과 논어를 완파했고 20세를 전후 해서는 성리학에 관계되는 서적은 물론 천문, 지리, 병학, 의서등 모든 분야를 통달했고, 안동 도산(陶山)에서 퇴계 이황(退溪 李愰)에게 근사록을 전수를 받았다. 퇴계 선생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하여 장차 대성할 인물임을 예언했다. 성리학의 학통을 바로 세웠으니 체용겸존설(體用兼存說)은 그의 스승 이황(李愰)이 주장한 지행병진설(知行倂進說)을 계승한 논리 체계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 두루 통달했을 뿐 아니라 6예(六禮 선비가 익혀야 할 여섯가지 기예 즉 禮 ,樂 ,射 ,御, 書, 數)에도 능했던 진유(眞儒)였다.
저서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 영의정에서 물러난 직후부터 임진란을 회고하며"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 하노라" 라고 서문을 썼다.
근폭집 (芹曝集)-보물 제160호 임진왜란 중 영의정 .도체찰사. 비변사로서 국왕에게 올린 차자(箚子)와 계사(啓辭)를 베껴 써서 편찬한 책 근폭이란 뜻은 "옛날 송나라에 농부가 늘 삼베 옷을 입고 겨울을 지내다 봄이 와서 따뜻한 햇볕을 쬐자 마음이 기뻐 이 따스함을 드리고 싶다 했고, 맛있는 미나리를 맛 보고는 우리 임금님께 드려야겠다" 고한 내용이다.
진사록(辰巳錄)-보물 제160호 임진년과 계사년의 기록이란 뜻으로 이름 지은 책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서 현지에서 군의 동정과 전황을 보고 하고 대비책을 건의하며 지휘관들에게 지시한 문서를 수록한 책
군문등록(軍門騰錄)-보물160호 사도(四道) 도체찰사로 국왕에게 올린 계사와 군문예 시달한 공문을 베껴 쓴 책
당장서첩(唐將書帖) 임진왜란 중 당나라 장수 30인의 편지를 모은 것
침구요결(鍼灸要訣) 의학 입문서 가운데 침구편만을 요약하여 편찬한 책 서문에 "의원이 없는 마을 사람도 의술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 이라고 했다.
관화록(觀化錄) 병환 중에 지은 시편을 엮은 책. 의미는 심신을 안정시켜 자연으로 돌아 간다는 것
관직 1566년 (명종 21년) 25세에 문과에 급제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정원 권지부정자(承政院權知副正字)로 임명 1569(선조 2년) 28세에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1572년(선조5년) 31세에 병조좌랑 겸 홍문관 수찬 (兵曹佐郞 兼 弘文官 修撰) 1581년(선조14년) 40세에 홍문관 부제학(弘文官 副提學) 1582년(선조15년) 41세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 1588년(선조21년) 47세에 형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刑曹判書 兼 弘文館 大堤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지경연 춘추관 (知經筵 春秋館) 성균관사(成균館事) 1589년(선조22년) 48세에 병조판서 (兵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1590년(선조23년) 49세에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광국 공신 풍원부원군(光國功臣 豊原府院君) 1591년(선조24년) 50세에 좌의정(左議政) 1592년 선조25년) 51세에 임진란이 일어나다.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 개성에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임명되었으나 일부 모함으로 당일로 파직 1593년(선조26년) 52세 충청 전라 경상 3도 도체찰사. 영의정으로 임명 1598년(선조31년) 57세 북인의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면 모든 관직 삭탈 1600년(선조33년) 59세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다. 1602년 (선조35년) 61세 청백리로 뽑혀 염근청백록(廉謹淸白錄)에 이름이 오르다. 1604년 (선조 37년) 63세 부원군(府院君)이 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호를 하사 받았다 1627년 (인조5년)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가 하사되다(道德博聞曰文,危身奉上曰忠)
공적 황윤길 김성일등을 통신사로 보내어 왜국(倭國)의 정세를 살펴 오게 하다. 조정의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왜국의 침공할 조짐을 명나라에 통고하도록 하다. 왜란에 대비해서 정읍 현감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로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 목사로 임명케 하다 임진왜란의 평정에 군사제도, 군량미 확보, 국민의 생활보호, 관기확립,요새 구축,등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퇴임후 1604년7월징비록을 저술하였다.(국보132호) 1604년9월에 충훈부에서 공신인 선생의 초상화를 그릴 화사를 보냈으나 나라에 공이 없다고 사양하여 돌려 보냈다. 1605년3월에 봉조하록(奉朝賀祿)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64세 9월(선조 38년 .1605년)에 풍산읍 서미리에 이사해서 이듬해3월 초가 삼칸(농환재(弄丸齋)을 짓고 거처하셨다. 선조40년(1607년음력5월6일)66세때 농환재에서 운명하셨으며 묘소는 풍산읍 수동 남향한땅에 예장되었으며 유명에 의하여 조촐하게 치루어젔다합니다.
선생께서는 노후에 세가지 한(三恨)이 있다고 하셨는데, 첫째는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한것, 둘째는 벼슬이 지나치게 많고 높았는데 속히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한것, 셋째는 도학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이룬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선생께서 말년에 거처하시든곳 풍산읍 서미동입니다.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는 말년을 학가산시슭 서미동 삼간초옥 농환재 에서 거처하시다가 66세에돌아가셨습니다. 이곳이바로 선생께서 계셨던 곳입니다.
奇答兒輩(기답아배) 자녀들에게 보낸편지.
吾自今年(오자금년) 나는 요즘에와서,
不樂在河廻(불락재하회) 하회동에 있는것이 즐겁지 않는데,
蓋擧目無非愁조故也(개거목무비수조고야) 그것은 보는것마다 쓸쓸하고 슬퍼서 마음만 상할뿐이다.
初欲往軍威(초욕왕군위) 처음에는 군위현으로 가볼까 하였으나,
亦非十分地(역비십분지) 그곳도 아주 흡족한곳은 못되더구나,
玆欲於鶴駕山麓(자욕어학가산록) 이제는 학가산 기슭에있는
中臺玆坡等向陽處(중대자파등향양처) 마을 가운데 양지바른 언덕에,
得一安靜臨溪處(득일안정림계처) 아늑하고 조용한 계곡을 내려다 보는곳에 자리를 얻어,
誅茅作數三間屋(주모작수삼간옥) 띠풀을 베고 터를 닦아서 두서너칸 초가를지어,
柴門盡俺伏奧(시문진엄복오) 사립문은 언제나 닫아두고 방안에 깊숙히 들어앉아 지내며,
養病計甚切(양병계심절) 병이나 치료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만,
第未知何處治當(제미지하처치당) 다만 어느곳이 적합할지 알수가없다.
西味洞權卜家北石壁下(서미동권복가북석벽하)서미동에 임시로 거처를정한 권씨집 북쪽 바위 절벽아래,
有甘泉(유감천) 맛좋은 샘물이 있는데,
中臺老僧(중대노승) 중대사의 늙은중이,
欲爲我結옥者(욕위아결옥자) 나를위하여 이곳에 집을지어 주겠다고,
已約之(이약지) 이미언약을 하였지만,
於汝輩意如何(어여배의여하) 너희들 생각은 어떠한가?.
1605년(선조38년)을사년 9월에 서미동 으로 이사하다. 1606년3월에 초당을 짓고 弄丸齋(농환재) 라 명명 하였다.
서애선생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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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안동시 풍산읍 수동에 있으며 묘소에는 "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之墓(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지묘)라는 묘전비만 있고 신도비는 유명(遺命)으로 인해 새우지 않았다.정경부인(貞敬夫人)전주 이씨가 부장되었다. 재사(齋舍)는 규모가 상당한데 묘소가 있는곳에서 고개하나를 넘은 외진곳에 있다.원래 재사가까이 묘소가 있었으나 손자인 졸재 류원지공이 장성해서 이곳에 터를잡아 면리하였다 합니다.10년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생전의 청백리(淸白吏) 녹선이 말해주듯 사후에도 조촐하게 장례를 치루었으니, 이는 유명(遺命) 때문이었다. 비는 손자 졸재 원지의묘갈명(墓碣銘)과 1764년(영조40) 외6대손 대산 이상정의 글씨로 6대손 도사 임여재 류운이 세웠다.
선생의 불천위 사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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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풍산읍 서미동 석벽아래 삼간초옥 弄丸齋에서 거처 하시다가 66세를 일기로 서거하신 다음 나라에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어낸 공을인정 재조산하공 이라하여 불천위제사를 드리도록 지시하였으나 집이워낙 가난하여 그 신위을 모실 사당조차 세울수없어 후학 정경세공께서 주동이되어 지역유림들의 도움을받아 손자 졸재 류원지(9세)를도와 사당을짖고 안채를지어서 선생께서 남시신 詩 에서 따서 충효당 이란당호를 쓰게되었습니다.
遠志精舍 와 燕坐樓 (원지정사 와 연좌루)
1576년(선조9년)에 서애선생이 부친상 을당하여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하회동 북림의 東쪽에 遠志精舍를 西쪽에 燕坐樓를 지어 여기서 학문을 닦았으며 또한 隱退(은퇴)후에 정량한 곳이기도 합니다.
遠志精舍란 선생이 "處卽爲遠志요,出卽爲小草"라는 故事를따서 지은 것이다.
遠志精舍記(원지정사기) 築精舍 干北林(축정사 간북림) 북쪽 숲속에 정사를 지으니, 凡五間(범오간) 모두 다섯칸이다. 東爲堂, 西爲齋(동위당, 서위재) 동쪽은 마루요, 서쪽은 서재이다. 由齋北出(유재북출) 서재에서 북쪽으로 나가다가, 又轉而西(우전이서) 서쪽으로 돌아서, 高爲摟 以俯江水(고위루 이부강수) 높게 루를 지었는데, 강물을 내려다 보기 위함이다. 旣成, 扁其額曰, 遠志(기성, 편기액왈, 원지) 집을 다 짓고서, 편액하기를 원지라 하고, 湖山登望之美, 不識言(호산등망지미, 불식언) 산수의 아름다움은 말하지 않았다. 客疑其義, 余告之曰, 遠志(객의기의, 여고지왈, 원지) 어떤 나그네가 그 뜻을 이상히 여기므로 내가 그에게 일러주기를 원지는 本藥名, 一名小草(본약명, 일명소초) 원래 약초이름으로서 일명 小草(소초)라고 한다. 昔 晋人, 問謝 安曰 “遠志, 小草, 一物”(석 진인, 문사 안왈, “원지, 소초, 일물”) 옛날 중국의 진(晋)나라 사람 환온(桓溫)이 사안(謝安 字는 安石)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한물건인데 而何 爲二名(이하 위이명) 어찌 두 이름을 쓰는가? 라고 했다. 或曰, 處爲遠志, 出爲小草(혹왈, 처위원지, 출위소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들어앉아 있을 때는 원지요. 밖에 나가서는 소초가 된다하니, 安有愧色(안유괴색)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余在山, 固無 遠志, 出 而爲小草, 則固也(여재산, 고무 원지, 출 이위소초, 칙고야) 내가 산야에 살 때에 본래 원지가 없었으니, 시정간에 나아가 소초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是有相類者(시유상류자) 이것이 서로가 비슷한 점이다. 又醫家 以遠志, 專治心氣, 能撥昏鷁煩(우의가 이원지, 전치심기, 능발혼익번) 또한 의가(醫家)에서는 원지로서, 오로지 심기(心氣)를 다스려,혼탁한 정신과 번민을 풀어 헤칠 수 있다. 余年來, 患心氣, 每餌藥(여년래, 환심기, 매이약) 내가 여러해 전부터, 심기가 맑지 못함을 걱정하여 늘 약을 쓸때마다 輒用遠志(첩용원지) 원지를 사용하니, 其功不敢望, 因推類, 而引其義(기공불감망, 인추류, 이인기의) 그 공을 내 감히 잊고 돌아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뜻을 미루어 보면 治心之說, 亦儒者商談, 如此數義(치심지설, 역유자상담, 여차수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설(說)은 우리 선비들이 늘 하는 말이다. 皆可爲齋號(개가위재호) “이 두가지 뜻만 하더라도 서재 이름으로 할만하다.” 하였다. 而舍後西山, 適産遠志(이사후서산, 적산원지) 정사 뒤 서산에 마침 원지가 저절로 자라나 늘 산비에 흠씩 푸른 빛을 머금고,每山雨時至, 靑翠秀佳, 助爲精舍幽趣(매산우시지, 청취수가, 조위정사유취) 빼어나는 모습이 隨命精舍, 曰遠志, 取其實也(수명정사, 왈원지, 취기실야) 정사의 그윽한 정취를 더욱 돋우어 주고 있음에랴! 드디어 원지정사라고 이름 한 것이니, 모두 사실을 취해온 것이다. 嗚呼, 遠者, 近之積也(오호, 원자, 근지적야) 아! 먼 것은 가까운 것이 쌓여져 나아간 것이요. 志者, 心之所之也(지자, 심지소지야) 뜻(志)은 마음이 방향을 잡은 것이다. 上下四方之宇, 古往今來之宙, 可謂遠矣(상하사방지우, 고왕금래지주, 가위원의) 상하사방의 끝없는 공간으로 보나 아득한 옛날로부터 흘러온 지금까지의 시간으로 보나, 우주란 참으로 멀고도 먼 것이다. 而吾之心, 皆得之焉(이오지심, 개득지언) 내 마음이 방향을 얻었고, 之焉 故有所玩(지언 고유소완) 방향을 얻은 까닭에 기뻐하는 것이며, 玩焉 故有所樂(완언 고유소락) 기뻐하므로서 즐거움을 얻었고, 樂焉 故有所望(락언 고유소망) 즐거워하므로서 자연 잊은 것이 있으니 望者何 忘其室之小也(망자하 망기실지소야) 잊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집의 협소한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淵明詩曰(연명시왈)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心遠之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세속과 머니 사는 것이 절로 한가롭도다 하였으니 微斯人, 五誰與歸, 是爲記(미사인, 오수여귀, 시위기)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누구와 더불어 취향(趣向)을 같이 할 것이었던가! 이로서 기(記)하노라. 戊寅 四月 望前一日 主人 西厓居士 書(무인 4월 망전1일 주인 서애거사서) 무인년(1578년 선조11년) 4월 보름 하루전날 주인 서애거사 쓰다. 甲申年(갑신년) 2004. 2. 河庭齋에서 십삼대손 柳永一 근역 陶淵明의 詩 飮酒 結廬在人境(결여재인경)이나, 내가사는 초가집 마을안에 있으되, 而無車馬暄(이무거마훤)이라, 시끄럽던 수레소리 들려오지 않노라.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오. 그대에게 묻노니 이럴수가 있는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이라, 마음이 멀리 있으매 사는 것이 절로 한가로울수밖에,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라가 , 동쪽편 울타리밑에서 국화송이 꺽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이라 , 허리펴고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에, 산의기운 밤낮없이 매맑기 그지없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이라, 날새들은 서로서로 짝지어 돌아간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하나, 내가 사는 이 삶에 참뜻 있건마는, 欲辯已忘言(욕변이망언)이라. 말하려하다가 할말 이미 잊었노라. ※ 욕변이망언(欲辯已忘言), 말하고자 하나 이미 할말을 잊음. 老子의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言者不知, 知者不言)에서 나온 것.
삼신당 노거수.
수령600년이 넘는 노거수 입니다.삼신당 이라하여 신의 영역입니다.하당 이라하여 해가바끼면 음력 정월 대 보름날 서낭당에서 동신을 모셔와서 이곳에서 제사를 올립니다.동래에사는 각성씨 대표가 유사가되어 부정한일을 하지않은 사람이 제관이되어 동래의 안녕을 비는곳 입니다.
서낭당
서낭당(上堂)은하회마을 주산(主山)인 화산(花山)중턱에 위치하며 신(神)의계시(啓示)가 내리는 마을의 성역(聖域)이다.매년 정월대보름날 마을의 평안과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洞祭)을 올리기 위하여 목욕(沐浴)재계(齋戒)한 산주와유사(有司) 그리고 제관(祭冠)이 상당에 올라 분향(焚香)하고 주문(呪文)을 올려 신의계시에 따라 서낭당,국시당,삼신당(三神堂)은 人間의삶을 지켜주는 天地人 에게 별신제(別神祭)를 올리는 의식장소이다 |
북촌댁 입니다.
경상도 도사를지낸 석호 류도성공이 철종13년(1862)에 창건한것으로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 별채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대문간이 7칸으로 그 중앙에는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몸채와 대문간과는 축을 달리하고있다. 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으나 하나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입구(ㅁ)자형을 이루고있다. 현재54칸이 남아있다. 웅장한 안채가 인상적이다. 정조18(甲寅)년 알성문과(乙)과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역임했으며 10책의 방대한문집을남긴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와 그의손자로서 추천을받아 경상도 도사직에까지 이른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으로 이어지면서 부귀영화를 누렸었으나 변소지붕만은 기와로 덮을수 없다하여 초가를이어 오늘에 이르고있다. 중요 민속자료 제84호
북촌댁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퇴마루 위에 걸어놓은 화경당(和敬堂)이란 현판을 볼수있다. 선조때의 명필 한석봉선생(조선조 4대명필중 한사람)의 글씨를 모각(따로 떨어져있는글씨를 모아놓은것)한것이다.
바른마음 가짐으로 더불어 함께사는집 이란뜻이있음.
敬=경자는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하는 수양론의 핵심이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다. 퇴계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敬 자바위 위에"백운동"석자를 음각하고 송백(松柏)과 대(竹)를심어 "취한대" 라이름짓고 <호연지기> 를닦게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 우리가 가지고있는 이기심을 줄이고 줄여서 나와 다른사람의 구별이 없어지고 드디어 나와 우주와의 구별마져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게되면 <탁트이고 자유스런 경지에 이른사람 > 즉 호연지기를 가진사람 이된다.
중용(中庸)
"喜怒哀樂之未發을謂之中이요"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들어나지 않은것을 일컬어 중이라하고,
"發而皆中節을謂之和라하니" 밝히되 모두 절도에 맞는것을 일컬어 화라고하니,
"中也者는天下之大本也요" 중 이라는것은 천하의 대근본이요
"和也者는天下之達道也니라" 화 라는것은 천하의 통달한 도이다.
"致中和면天地位焉하며"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여기에 위치하게되며,
"萬物育焉이니라" 만물이 여기에서 길러지게 된다.
草牧 柳 永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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