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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 “병산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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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산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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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산서원권에 자리 잡고 있는 병산서원은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같이 하여, 서원 안에 묘우(사당)를 세우고 위패를 모셨습니다.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여 제향(제사)을 올리던 서원이당입니다.(1977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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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 |
■ 병산서원의 향사(춘추향사) 춘추향사제는 병산서원의 두 제향(류성룡 선생, 류진 선생)을 받드는 제사로 봄, 가을 두 번 치러지는 병산서원의 가장 큰 행사입니다.
√ 향사일 3월 초정일(음력), 9월 초정일(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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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은 화산을 등지고 앞으로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고 강 건너 편에는 변산 창벽이 병충처럼 둘러쳐져 있어 자연경관이 명승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 멀고 한적한 곳이라 사람의 내왕이 번잡하지 않아서, 학문을 탐구하는 유생이 수학하는 곳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지리조건을 갖춘 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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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의 겨울 |
http://myhome.eandong.net/chodangryu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에 있는 서원으로 1978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민속마을로 지정된 풍산(豊山) 류씨(柳氏) 집성촌인 하회마을과는 화산(花山)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병산서원은 산의 동쪽에 있고,하회마을은 그 반대쪽에 있다. 낙동강 물줄기가 흘러 내려오다가 화산 을 만나 센 물살을 만들며 물항아리 모양으로 휘감아 돌아 남쪽으로 흘러 나가는 강가 언덕에 있다.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있던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 (豊岳書堂)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다.서당은 본래 풍산읍에 있었는데,1572년(선조5)에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서당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병산서당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후 임진왜란때 소실된것을 1613년(광해군5)에 서애의 제자인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1563-1633)등 지방유림이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해 존덕사(尊德祠)를 건립하면서 향사의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되었다.그후 1662년 수암(修巖)류진(柳袗,1582-1635)이 추가 배향되었으며,1863년(철종14)에 '병산(屛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서원은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27개중 하나이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운 선조때의 문신으로, 정언(正言),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대사성(大司成,도승지, 경상도 관찰사,대제학(大提學),병조판서,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했다.임진왜란때는 선조를 호종(扈從)하며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특히 이순신,권율 등을 등용하여 임진왜란을 역전시키는데큰 공을 세웠다.서애는 1598년(선조31)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징비록(懲毖錄)]등을 집필했다.
징비록]은 우리 역사 상 가장 위급했던 국난을 이겨낸 구국의 내용을 기록한 서애의 회고록이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 되어 있는 이 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칠 년간의 전황을 기록한 것으로, 다시 이 나라에 이러한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후세에 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이 책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전황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서이다. 책이름 [징비록]은 [시경(詩經)] <소비(小毖)>편에 "미리 지난 일을 징계(懲)해서 뒷 근심 이 있을 것을 삼가한다(毖)"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서애는 하회마을 앞 낙동강 건너 부용대(芙蓉臺) 기슭에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징비록]을 구상하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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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사는 집 앞 소(沼)의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 옥과 같은 까닭에 붙인 이름이다. 류성룡의 호 '서애(西厓)'는 서쪽에있는 언덕이라는 뜻인데 해마다 여름이면 큰 물이 들어서 그때마다 서쪽언덕에 부닦친물이 얕은구렁으로 바로넘어가서 마을은 언제나 보호가 되었는데 바로 그 언덕을 자호로 삼았고 [징비록]은 서애 후학 들이지역유림의 도움으로 지어놓은 하회마을의 충효당 안에 있는 유물관인 영모각(永慕閣)에 다른 유물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병산서원은 화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산자락에 남향을 하며 자리잡았다. 서원 앞으로는 낙동강 물 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이 있다. 병산은 산의 형상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서원에서 앞을 바라보면 강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지며, 그 옆 언덕에는 노송들이 꿈틀거리며 서 있고, 강물 속에는 병산이 깊게 그림자를 띄우고 있다. 이 강변에 잇대어 하회마을로 넘어가는 산자락이시작된다. 병산서원은 바로 이러한 강물과 병산을 마주 보는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 내삼문, 입교당(立敎堂), 동재, 서재, 전사청, 장판각, 만대루(晩對樓),복례문(復禮門), 주사(고직사) 등이 있다. 복례문은 서원의 정문이다. 본래 만대루 동쪽에 있던 대문을 1921년 이전하여 중건한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규모의 솟을대문이다. '복례(復禮)'는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에서 따온 말이다. "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라는 이 뜻은, 곧 세속적인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을 갖고 있다.정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이층 누각 만대루가 가파른 계단 위에 옆으로 길게 서 있다. 만대루는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로, 누 아래에는 자연스런 형상 그대로의 구불텅한 수많은 나무기둥이 열을 지으며 이층 누를 받히고 있다. 서원은 이 누 밑을 지나 강당 앞마당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다. 자연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위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 기둥들이 정제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유학의 꼿꼿하고 청청한 맥이 동시에 아래, 위층 건물에 살아나 있는 듯하다
만대루의 '만대(晩對)'는중국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에서 따온 것이나,혹자는 " 병풍같은 푸른 산기운에 취해 늦도록 편안하게 마주 대할만 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누각의 이름을 시에서 빌려 왔듯이 만대루가 얽어내는 공간은 가히 시적이다. 이곳에 서면 한쪽으로는 병산과 낙동강을 낀 자연이 펼쳐지는 경관을 읽을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원 일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원의 자리로 번잡한 거리의 우마(牛馬) 소리를 멀리해 뛰어난 경치를 지닌 곳을 택하는 까닭은, 영기(靈氣)를 지니고 있는 곳이어야 걸출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만대루 누마루에 서면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이 만대루는 유생들이 휴식도 하고, 풍광을 보며 시회(時會)를 가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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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조성된 공간 서쪽으로는 물길을 끌어만든 작은 연당 광영지(光影池)가 있는데, 방형의 연당 속에는 원형의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다. 이 방지원도(方池圓島/天圓地方에서 유래)의 주변에는 봄부터 붉게 피는 배롱나무와 사철 청청한 대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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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者何哉乎(죽자하재호) 대라는것이 무엇인고하니, 其本固(기본고) 그 근본은 굳고(단단하고), 其莖直(기경직) 그 줄기는 곧고(바르고), 其心虛(기심허) 그 마음은 비었으며, 其節堅(기절견) 그 마디는 견고하고, 其行直(기행직) 그 행실은 바르고, 其氣淸(기기청) 그 기운은 맑고, 經霜雪而不고(경상설이불고) 서리와 눈을 맞고도 얼지않는것을보면, 可以爲人法(가이위인법) 가이 사람이 본 받을법하다.
河南 柳 漢 尙 先生 作
대라는 것은, 그 근본은 굳고,그 줄기는 곧고,그 마음은 비었으며,그마디는 견고하고,그 행실은 바르고,그 기운은 맑고,서리와 눈을 맞고도얼지 않는것을 보면,가이 선비가 본 받을법하다,하여 옛 선비들은 본받을만한 자연을 의인화하여 주변에 가까이두고,심성을 다스렸든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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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에는 연을심었는데 심은 이유는 염계 周敦이(1017~1073)선생께서 지은 애련설에서 본받아 연꽃의 이미지를 통하여 군자의 고고한 삶을 지향했다 합니다,연이 더러운 진흙에서 자라지만 깨끗함을 지닌것이 선비의 이미지와 닮았다.한평생 알아주는이 없어도 저 홀로 은은한 향기를 발하듯 속세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히 살아가는 군자의삶을 본받고자 함이라 합니다,
강당인 입교당은 아비에게 효도하는 방법을 바르게 가르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정면 다섯 칸, 측면 두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고 양쪽 각 한 칸은 온돌방이다. 동쪽의 온돌방 명성재(明誠齋)는 원장이 기거하던 곳으로, 이곳에 앉으면 서원 모든 곳이 읽힌다. 앞쪽으로는 동,서재 등 강학공간, 그리고 만대루와 그 건너 자연이, 강당 동쪽 협문 밖으로는 전사청이, 강당 대청 뒤 판문 밖으로는 장판각이, 강당 동북쪽 뒤로는 전사청과 사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 방 경의재(敬義齋)는 유사들이 기거하던 곳이다.특히 이방에는 서쪽으로 들창문을 내어놓고 유생들로 하여금 하회남산이라 불리는 삼태봉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이 삼태봉은 옛부터 세분의 정승을 탄생시킨다는 전설이 담겨있기도 하다,


강당 대청 가운데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앞쪽을 바라보면, 서원 일대의 경관이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 들어온다. 만대루 이층 일곱 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일곱 폭 병풍이 되어 얽히며 펼쳐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극적인 공간 분위기를 만들어, 바로 나 자신이 자연 가운데에 묻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원생이 기거하며 수학하던 동재와 서재가 위치했는데, 정면 네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툇간을 조성했다. 동재의 큰방은 동직재(動直齋), 서재의 작은 방은 마루방으로서 장서실(藏書室)이다.
동쪽에있는 동재는 動直齋인데 선비가 모든일을 할때는 정직해야한다는 뜻을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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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있는 西齋의 적은방은 장서실인데 책을 보관하던 서고입니다.
강당 동쪽 옆을 돌아 뒤로 들어가면, 언덕 위에 있는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사당인 존덕사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 북벽에 류성룡을 주벽으로 모시고, 동벽에 류진을 종향하고 있다. 사당 앞 동측 계단 옆에는 관세대가 있고, 사당 기단의 양측 계단 앞에는 정료대가 길쭉한 팔각 석주의 구조물을 하고 서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와 입교당 대청에서 읽히는 건축공간과 경관의 얼개는, 건축을 둘러싼 산천경개가 어떻게 건축의 공간미학으로 재구성되어 되살아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부분이다. 병산서원의 건축은 산하를 알고, 그 속에 건축을 얽어 만든 정신과 방식을 아는 데 길잡이가 되는 실례를 잘 보여준다.병산이 있고 낙동강이 설정된, 이러한 산하를 갖춘 곳에 하나의 인공물을 집어넣는 데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병산서원은 태초부터 있어 온 이 자연에 공간을 열리게 하고 트이게 하는 방식으로, 마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듯한 건축을 만들어 내고 있다.특히 사위가 조용한 청아한 밤에 서원 일곽을 이루는 공간은 마치 길고 짧은 긴장과 완화가 이어지는 가락으로 가득 찬 듯하다. 담과 건물들로 둘러싸인 서원 뜰은 텅 비었으되, 그냥 텅 비어 있지 않음을 지붕과 담의 선에서 나타나는 리듬과, 그것을 배경으로 저 멀리 서 있는 병산과 소나무에서 읽을 수 있다. 텅빈 마당위를 덮는 나무와 그 속을 흐르는 구름과 달을 배경으로 기둥과 누각 지붕 사이로 다가오는 병산의 산세라든가, 들창문을 통해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병산서원이 예사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병산서원이 주는 이러한 건축미는 눈으로, 소리로, 어둠과 빛으로 느끼는 그 모든 것이다. 병산서원은 한국의 서원건축이 주는 아름다움이라는 가능태를 우리에게 실제로 접하게 한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柳成龍) 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던곳.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 여종3000여책이
소장 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같이 하여,
서원 안에 사당(존덕사)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서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며 향사(제사)를 올리던 서원입니다.
이 제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춘추향사
춘추향사제는 병산서원의 두 제향(류성룡선생, 류진공)을
받드는 제사로 봄, 가을 두 번 치루어 지는 병산서원의
가장 큰 행사입니다.-향사일(음력) : 3월초정일,9월초정일
병산서원이 설립된 유래
* 고려 때, 안동의 풍산현에 풍악서당이 있어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 고려말,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지날무렵, 그곳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난리중에서도
독서에 열중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 하였다고 합니다.
* 이때,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호패와 땅)을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 하였습니다.
* 이후, 약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 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것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 이때, 마침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와 계실때였기에 유림들은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였다고 합니다.
* 서애 선생께선 그 문의를 듣고 병산이 가장 적당할것이라고
권하게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서 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 이라고 고처 부르게 되었습니다.(1572)
* 임진왜란으로 불에탄 서당을 다시 중건하였고(1607), 사당
'존덕사' 를 건립하면서 서원이 되었습니다.(1610)
* 그후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많은
학자들을 배출 하였으며, 1868(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않고 남아있는47곳 서원과사(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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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과 자연
빼어난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이라 불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산을 등지고 앞으로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고
그 투명한 푸르름은 소나무의 짙푸름과 서로 다투는 듯 조화롭습니다.
만대루에서는 주변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조화된 병산서원의 미(美)를 더욱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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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260호 병산서원 입교당 입니다.
서원의 구조

<병산서원 전체 구조도>

존덕사
서원 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서애 류성룡 선생과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 공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1610(광해군2)년 우복 정경세공을 비롯한 사림들이 이서당안에 존덕사 를세우고 1614(광해군6)년 선생의 도학과 훈업을 흠모한 나머지 선생의 위판를 봉안함으로서 ,비로서 향사기능을 갖춘 서원 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후 1662(현종3)년 사림에서 세째아들 수암 류진 공을추가로 종향하였습니다.서애는 1598년(선조31)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하회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징비록등을 집필하였습니다,<징비록>은 우리역사상 가장 위급했든 국난을 이겨낸 구국의 내용을 기록한것으로,다시는 이나라에 이러한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에서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썼다고 합니다.
서애는 1598(선조31)년 임진왜란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해7월 정웅태 무주사건 에대한 진주사를 노모가 93세라 먼길은 갈수없다고 고사했고 왜(일본)와 화의를 주선했다하여10월19일 북인 문홍도에의한 탄핵으로 영의정을 파면당했으며 그해12월5일 모든관작을 삭탈당하였습니다. 1599(선조32)년 2월16일 하회로 돌아오셔서 옥연서당에서 거쳐하셨습니다. 1600(선조33)년 11월 59세때 직첩을 되돌려 받았으나 이후 출사하지 않으셨습니다. 1602년(선조35)4월 61세때 청백리로 뽑혀 염근청백록에 기록되었으며 영모록을 지었으며 1604년(선조37)7월 징비록(국보132호) 집필을 마쳤습니다.다시 부원군이되고 호성공신 호를 하사받았으며1605(선조38)년 을사년9월에 학가산 기슭 서미동 으로 이사하여 중대사 노승의 도움을받아 1606년(선조39) 3월에 초가를짓고 농환재라 명명하시고 그곳에서 1607년(선조40)5월6일 66세에 이르러 별세하셨습니다. 풍산읍 수동 남향 한 땅에 예장 하였습니다. 1614년(광해군6) 위판이 봉안되었고1627년(인조5) 문충(文忠)에시효가 하사되었습니다.
"도덕박문왈문 (道德博聞曰文) 위신봉상왈충 (危身奉上曰忠)"
후학 우복 정경세 선생이 선생의 아들에게지어보낸 시
하상전가지묵장(河上傳家只墨莊) 하회의 유업은 시서(詩書)뿐이라서
아손소려불충장(兒孫蔬려不充腸) 자손들은 나물밥도 배불리 못 먹네
여하장상삼천일(如何將相三千日) 십년을 정승자리에 계셨으면서도
병흠성도팔백상(倂欠成都八百桑)어찌타 살아갈 방도조차 마련치못했는지.
수암 류진 공은
1627(인조5)년 46세때 청군이 침공해서 상주에서 의병장이 되었습니다.
곧 청도군수를 재직후 돌아오니 군민들이 거사비를세워 칭송했습니다.
柳候袗仁政碑(류후진인정비)
愛如子愛如父治民髓其可忘(애여자애여부치민수기가망)
"아들처럼 사랑하고 부형처럼 아끼어서
백성들의 골수에 배었으니 어찌 잊으리오"
1633(인조11)년 협천군수 직을버리고 돌아오니 군민들이 송덕비를세웠다.
柳候袗萬古仁淸碑(류후진만고인청비)
一團心德萬壑淸氷來暮去速欲훤何能(일단심덕만학청빙래모거속욕훤하능)
"봄바람의 온화한 덕이요 얼음같은 맑은지조로다.
찾아주심 늦었으며, 떠나가심 빨랐으니 잊으려 하온들 어찌 잊을손가".
라고 비명에 쓰여있다.
1656(효종7 병신)년 9월에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 에증직되
었다가,10월에다시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
을증직 받았다.

입교당(立敎堂)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강학당(講學堂), 한마디로
수업을 받던 '교실' 입니다. 입교당은 중앙은 강학당, 동쪽으로
명성재 서쪽으로 경의재 로 모두 세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경의재에는 서쪽으로 들창문이 한곳있는 열어보면
하회 남산위 봉우리인 삼태봉 이 보이는데 풍수설 에 의하면
삼정승 을 상징하는것 이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기 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쪽으로만 창문을 내었다합니다.
"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을 바로 가르킨다" 라는 뜻의 입교당은
서원의 중심에위치 하고, 병산서원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서애(西厓)선생께서 평소에 동료와 후학들에게 하신말씀중엔,
"식견이 부족하면 큰일을 하지 못할 것이며 재주가 골고루 미치지 못하
고 한정되어 있으면 사리에 통달하여 활용할 줄 아는 학자가 될수없다."
"책이나 읽으며 글자풀이나 한다고해서는 선비일수없고,
최소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하게 해줄(治國安民)
능력이 있어야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히하며
문무(文武)를 겸해야만 참된 선비라 할수있다"고 밝히셨습니다.
"수유(竪儒)학문에 익숙지못한 부족한선비,부유(腐儒)부폐한 선비,비유
(鄙儒)더러운 선비,구유(拘儒)험이많은 선비,도유(盜儒)도둑질을 일삶는
선비,천유(賤儒)돈이나 밝히는 천한선비,리유(俚儒)적은것에 메어있는
속된선비,공유(空儒)매사에 트집이나잡는 쓸데없는 선비,등을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못된이름의 선비"라고 거론하셨고,"실용의 능력을 지닌 순유
(醇儒)순진한 선비나통유(通儒)통달한 선비만이 세상에 도움을주는
선비다"라고말씀하셨다하며, 천문, 지리, 수학, 의술, 병법, 등에도
해박한지식을 겸비 하셨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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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각
서원에서 펴낸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전사청
위패가 모셔진 존덕사의 오른편에 위치 존덕사에서 쓰일
제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동재의 큰방은 動直齋라 하였고 곧게 움직이라는 뜻이 있으며,
서재의 적은방은 藏書室입니다.학동들이 거처하든곳 입니다.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에 위치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워져
있는 건물은 당시 학문에 열중하던 유생들의 기숙사였습니다.
동재가 서재에비하여좀낮게 배치된것은 동재뒷편산이 봉우리가
순하여서 보이게 하고져이며. 동재,서재,모두 만대루쪽이 좁게
안으로 틀어져 앉은것은 풍수설에 의한 앞에있는
험한산 을 안보이게 처리 하기 위해서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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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루 (晩對樓)
두보의시(詩) 백제성루(白帝城樓)에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라는귀절에서 따온것임(푸른 절벽은 오후늦게 대할만 하니)에서따온것인데,병풍같은 푸른 산기운에 취해서 늦도록 편안하게 마주 대할만한 자리입니다
백제성루(白帝城樓) 두보
강도한산각(江度寒山閣) 강은 차가운산 전각을 지나고,
성고절새루(城高絶塞樓) 성은 아득한 변방 누각에 높다,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절벽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녁이 마주할만하고,
백곡회심유(白谷會深遊) 흰바위 골짜기는 여럿모여 즐기기 좋구나,
급급능명안(急急能鳴雁) 울줄아는 기러기는 빠르디 빠르고,
경경불하구(輕輕不下鷗) 내려오지 않는 갈매기는 가볍디 가볍다,
이릉춘색기(夷陵春色起) 이릉에 봄빛이 일어나니,
점의방편주(漸擬放扁舟) 점점점 작은배를 띄워볼까하네.
유생들이 행사때에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
병산서원에서 가장잘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 입니다. 이곳 만대루에서 병산을 바라보며 시를 읊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登 晩對樓(등 만대루) 만대루에 올라,,
平生未暇 踏名區(평생미가 답명구)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곳 못왔더니,
白首今登 晩對樓(백수금등 만대루)백발이된 오늘에야 만대루에 올랐구나,
江上似畵 東南列(강상사화 동남열)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펼쳐있고,
江流日夜 而有聲(강류일야 이유성)강물은 소리내며 밤낮으로 흐르누나,
風塵萬事忽忽馬(풍진만사 홀홀마)지나간 모든일이 말을타고 달려온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 범범부)우주간에 내한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 看勝景(백년기득 간승경)백년동안 몇번이나 이런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 老丈夫(세월무정 노장부)세월은 무정하다 나는벌써 늙어있네,
( 김삿갓 의시 안양루에올라 를인용하였음.)
草牧 柳 永 一
登高 (높은곳에 올라) 杜甫(두보)
風急天高猿嘯哀(풍급천고원소애) 세찬바람에 하늘은높고 원숭이소리 애달픈데,
渚淸沙白鳥飛廻(저청사백조비회) 물맑은강가 흰모래톱엔 물새가 날아앉네.
無邊落木蕭簫下(무변락목소소하) 가엽게도 지는잎은 쓸쓸히 떨어지고,
不盡長江袞袞來(부진장강곤곤래) 끝없는 장강물은 도도히 흘러오네,
萬里悲秋常作客(만리비추상작객) 만리밖 쓸쓸한가을 언제나 나그네 되어,
百年多炳獨登臺(백년다병독등대) 한평생 병을지고 홀로 대에 오르네,
艱難苦恨繫霜빈(간난고한계상빈) 온갓 어려움에 귀밑머리 희어지고,
료倒新停濁酒杯(료도신정탁주배) 늙고 쇠약하여 탁주마저 끊었다네.
빈/귀밑털 빈, 료/큰비 료
春歸(봄에 돌아와서) / 杜甫(두보)
苔徑臨江竹(태경림강죽) 강가 대나무 숲 이끼 낀 오솔길, 茅첨覆地花(모첨복지화) 꽃은 피어 초당 앞의 뜰을 덮었네, 別來頻甲子(별내빈갑자) 떠나간 후 세월만 덧없이 흘러, 歸到忽春華(귀도홀춘화) 돌아오니 어느덧 봄 꽃 핀 시절, 倚杖看孤石(의장간고석) 지팡이 의지해 고석을 바라보다, 傾壺就淺沙(경호취천사) 모래밭에 나가 술병을 기울이니, 遠鷗浮水靜(원구부수정) 멀리 물 위엔 갈매기 떠 고요하고, 輕燕受風斜(경연수풍사) 날쌘 제비는 바람타고 비껴 가네, 世路雖多梗(세로수다경) 가시밭길 세상사 어렵다지만, 吾生亦有涯(오생역유애) 우리 인생 어차피 끝이 있는것, 此身醒僚取(차신성복취) 술이 깨면 다시금 취하면 그뿐, 乘興卽爲家(승흥즉위가) 흥이 나면 어디든 내 집인 것을.
산은 옛산이로데 , 물은옛물이아니로다.
주야로흐르니, 옛물이있을소냐
인걸도 이와같아야, 가면오지못하메라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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