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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7 20:20:12 조회 : 4598         
  충효당 영모각(유물들) 이름 : 하회촌지킴이 

  

충효당은 임진왜란시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극복한 서애 류성룡 (柳成龍) 선생 종택으로 양진당과 함께 하회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서애 선생은 1607년(선조 40년)66세로 향리(풍산) 서미 농환재 초당(弄丸齋 草堂)에서 운명하셨고, 충효당은 서애 선생의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1598-1674)공이 창건하고 증손인 눌재(訥齋) 류의하(柳宜河, 1616-1689))공이 확장 증수했고 행랑체는 선생의 8대손인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祚 1763-1838)공이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군사들의 막사로 지었다 한다.

충효당의 현판  
효당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에 충효당이란 당호가 눈길을 끈다.
현판은 명필 미수(眉搜),
허목(許穆, 1595-1682. click)이 쓴것 이다.
명필을 감상할 식견은 없지만, 전서체 (篆書體 )로 매우 위압적인 명필이라 한다.
무심코 지나쳐 버리면 별 것 아니지만 하회에 맨 처음 터를 잡은 것이 허씨들인데 허씨들의 탈놀이는 안씨들을 거쳐 류씨들도 계승하였고, 충효당 현판을 쓸 그 당시에는 이미 허씨들은 하회를 떠났을 터인데 옛터 전에 대성한 서애 선생의 종택에 허목이 쓴 현판이 눈길을 끈다.






허목(許穆)1595-1682)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양천 . 자 문보.화보(文甫.和甫)  호 미수(眉搜) 시호 문정(文正)
현감 교(喬)의 아들로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에게 배웠다.
1662년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송해 나가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朴知誡)에게 그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 당하는 벌을 받았다. 자봉산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현종이 즉위후 경연에 참가 하였으며 장령이 되었다.
예송논쟁(禮訟論爭)-(효종에 대한 인조계비 조대비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이 주도 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며 3년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논쟁.)으로 삼척부사로 축출.
그후 남인이 집권 함에 따라 우의정 까지 임명됨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 까지한 흔치 않는 인물.
사상적으로 이황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 시킴으로서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시, 서 ,역 .춘추.예의 오경 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전서(篆書) 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저서에 기언(記言), 역사서인 동사(東史), 예서(禮書)인 경례유찬(經禮類纂),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 삼척읍지인 척주지 (陟州誌)가 있다


 
 

충효당 사랑채를 오른편으로 돌아 가면 서애 선생의 유물을 보존한 영모각이 보인다. 

영모각은 1965년 9월에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이 유물을 일반인에게 공개 하도록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원 하도록 하여 1966.6.11월에 개관 하였다.  

영모각이란 현판(현재 영모각 안에 보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그러나 양옥식으로 건축되어 마을 경관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협소 하기도 하여 1977년 6월 9일에 57평의 한옥식 현 건물을 준공케 되었고 ,
현재 영모각이란 현판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한사람의 글씨이지만 처음 현판과 현재 현판은 글씨가 다른 것이 단순히 더 달필이 되었기 때문 만일까?

이유물은 본래 영모각 맞은편 사당(祀堂)안에 궤안에 보관 되어 있었는데 그
자물쇄가 특이하여 열쇄 3개가 동시에 꼽혀야 열 수 있게 제작 되어서 종손이 1개 유사 2명이 각 1개씩 소유하여 3인이 합의 해야 열 수 있었으니 그토록 엄중한 보관제도 때문에 오늘까지 귀중한 보물로 남게 되었고 그 궤와 자물쇄도 영모각 안에 보관 되어있다.

영모각에는 국보132호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보물160호 군문등록(軍門騰錄)외 25종류 보물460호 서애선생필첩(西厓先生筆帖)외 34종류  그외 중요 유물 20 종류와 교지(敎旨) 문헌들이 다수  보관 전시 되고 있다.

(목록은 아래에 상세기록) 


[영모각]

 
[영모각 현판]


[현재 영모각]


[자물쇠]

 

징비록은 서애 선생이 (1542-1607)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 고향(옥연정사)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술한 (1592-1598)의 임진왜란 에 대한 친필 회고록이다
징비(懲琵)란 뜻은 지난날을 징계하고 ,뒷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주송(周頌)  "소비(小琵)에서 따온 것이다.(국보132호)

징비록 서문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임진난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 것은 임진난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아! 임진난의 참화는 참혹하였다.
수십일 동안에 삼도를 지키지 못하고 팔도가 산산이 깨어졌으며, 임금께서 피란 하셨으니 그리고 서도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다.또한 조종(祖宗)의 어질고 후한 은혜가 백성에게 굳게 맺어져서 그들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으며,임금의 중국을 섬기는 성심이 황제를 감동시켜 명나라의 원군이 여러 번 나온 때문이 었으니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 하노라 했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이하 생략



[징비록] 구보132호



 
[친필회고록]


영모각 유물을 반쯤 구경 하다보면 유서통 (諭書筒)이 라고 설명문을 붙인 대나무로 만든 이상한 통을 볼 수 있다    이유서통은 임금님이 고관에게 중대한 사명을 내릴 때의 지령서를 유서(諭書)라고 하였는데 이 대나무 통은 유서를  담아서 사용 하였던 것이 라는 설명이다.
 이 유서통은 중대한 문서이기에 엄중한 보호가 필요 했다.
 그래서 별도의 호위도 없이 평소에는 양반들 앞에서는 고개도 못 펴고 살든 낮은 신분에                               

전령(하인배)이 유서통을 메고 가게 됨으로 보안을 위해 국법으로
이 유서통을 메고 가는 자에게 길을 가로 막거나 시비를 벌 리거나 방해하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법을 적용 하였다고 한다.
그러 하였으니 이
유서통을 메고 가는 자의 행패가 어떠 했겠는가?
천한 신분으로 평소에 맺힌 권세에 대한 한 풀이로 아무리 거드럭 거리며 행패를 부려도 그누가 감히 대항하며 시비를 따질 수 있었으랴. 주막이나, 관아에나, 양반에게도, 무소불위로 행패를 부렸기에 분수없이 행패를 부리는 자에게
유세통 졌나?유세 부린다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임진애란에 위급한 우리나라는  명 나라에 원군을 청하게되었고 , 이여송(唐將 李如松)은 원병을 이끌고 왔다전쟁터에 특히 원군(援軍)의 행패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데,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서애 선생이 임진년 (壬辰年) 12월 명(明)나라 제독(提督) 이여송을 안주(安州)에서 마중을 하게 되었는데 이여송은 아무말도 없이 오만방장한 자세로손을 내 밀었다 한다.



[당장제시선]보물160호

이에 서애 선생이 도포자락에서 평양 탈환을 위한 작전수의서(作戰搜議書)를 내밀었더니 크게 놀란 이여송이" 조선은 적지만 인물은 크다 "고 감탄 하면서 들고 있던 부체에 시 한수를 써 주었다 한다 .당장제시선(唐將題詩扇)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여송의 5대조는 명나라에 귀화한 조선사람으로 성주이씨(星州李氏)의 후예라 하며 ,당시 조선 주둔중에 조선인 부인을 맞아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경남 거제군에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한다.


유교문화권인 조선시대에는 여자는 모든면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남자에 예속되었었다. 그런데 엄청난 예외?(대우)도 있었다.
부인을 두고 남자가 먼저 죽으면 재산의 상속권이 일단 부인에게주어졌다가 부인이 상속권을 행사 했다는 사실이다.
분재기(分財記)는 서애선생이 32세 때에 선친 감사공이 별세하여 유산이 미망인 김씨에게 상속되었다가 그후20년뒤에 시댁과 친정의 제위토(祭位土)와  접빈용토지( 接賓用土地)를 먼저 분재하고 나머지 유산을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분배 한다는뜻을 쓴 기록이다



[분재기 )                     ]



호패
를 찬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신분에 따라 재질이 차이가 있었으니그림의 세 개의  호패는 검은색의 나무로 만들어 진 것과 검은색의 물소뿔로 만들어 진 것,
흰색 상아로 만들어 진 3종류의 것이 있다.


[호패]                       


 

흔히 보는 갓이니 볼 것 없다고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유교 사회에서 의관은 특히 신분의 상징이 었으니 일반적으로  갓은 말총으로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갓은 대나무를 세미하게 가공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니그정성과 기술에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갓(笠子) 보물460호

이조 시대에 여자들은 흔히 인권도 없고 천대만 받은 것으로   생각 한다. 그런데 세애 선생 이 벼슬이 판서가 되었을 때 부인 이씨는  정부인의 직첩을 받았다. 실권이 있는 벼슬은 아니지만 명예(내조의 공을 위로하려 함이 었을까?)를 부여 하였다 .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부인 이씨는 죽은 후에도 서애 선생이 영의정이 되었을 때 추서로 증 정경부인으로 직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유교는 그 만치 명분을 중시 했기 때문일까


 

 임진왜란 당시의 유일한 갑옷                                                     

 임진 왜란중에 서애선생이 전쟁터에서 착용 하셨던 것으로 현재 유일한 갑옷이며
목 부분은 철편을 가죽끈으로 엮었고
몸통 부분은 가죽편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겄이다
 보물460호

 

갓끈(주영珠瓔 )                                         

서애 선생이 쓰시던 갓 끈으로
전립용(戰笠用과
입자(笠子)용이 있는데 모두가 신분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하였다
  보물460호

 

 

 조복띠(朝服)                                         

조복(관복 官服)위에 착용하는 허리띠
보물460호

                                    

 가죽신(혁화革靴)

 
평상시에 신었던 가죽신인데 이 가죽신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제법 발이 큰 사람도 신을수 없을 만치 큰걸로 미루어 보아
선생의 체구가 장대 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고
옛사람들의 체구가 평균적으로 지금보다 컸다고 하며
일본사람들을 왜구(倭寇)라고 하는말에는 적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보물 460호

 책상(冊床)

선생이 애용하든 책상으로 뒷면에 이 책상의 내력을 적은 음기가 새겨져 있는데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생의 탁월한 경윤과    높은 학문이 여게에서 나왓다
 

 

  홀(笏)

은 벼슬을 하는 이가 왕을 알현 할 때 들고 가는 것으로상아로 만들었다. 왕이 지시를 할 때에는 먹은 병에 넣어서 차고 다니고 붓은 도포 자락에서 꺼내어서 여기에 기록을 하였기에 먹 자국이 있다

 

영의정 임명 교지(領議政 任命 敎旨

1952년(壬辰)5월2일 파천(播遷)길에 선조대왕은 개성에서 선생을 영의정에 임명 하였는데 그때의 임명장이다
그런데 영의정으로서 경연홍문관 (經筵弘文官) 예문관 (藝文館) 춘추관 (春秋館)
관상감사(觀象減事) 세자사 (世子師)까지 겸직했다
보물160호


침구요결(침구요결)

 
선생은 문무에 능할뿐 아니라 의학에도 많은 연구와 깊은 조예를 가지셨으며 두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침구요결 (鍼灸要訣)과 의학변증지남 (醫學辯證指南)이다

관화록(觀化錄)

선생은만년에 병환중 소회를 적은 시를 모아서 관화록이라 하였는데 시 이외에 국왕에게 올린  유소 2편과 자질(子姪)들이 남긴 유훈 1편이 수록 되어 있다

동국지도(東國地圖)

사도(四道)도체찰사로 재임시 북 방오랑캐를 대비 하기 위하여 두만강 일대 육진의 방어 시설을 상보토록 한 지시에 의하여 함경도 북병사가 그려 올린 지도이다

구주대통력(具註大統歷)

 
당시명나라로부터 받은 역서(歷書)를 우리나라 계절에 알맞게 재편하여 항상 휴대하여 중요한 일기를 기록한 것이다

 

정원전교(政院轉敎)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에 내치 외교 및 군사를 총지휘한 선생에게 승정원으로 부터 77통의 왕명이 전달 되었는데 그 원문을 모은것이다

이통제사 애사(李統制使 哀詞)

이순신장군을 추천한 선생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몰한후 순국을 애도하여 이시를 지었는데 구주 대통력 뒷면에 기술 하였다

그외에
근폭집..국왕에게 건의한문서 수록
진사록,,군의 동정과 전항을 급보하고 긴요한 대비책을 건의한               문서
군문등록..도체찰사로 건의문과  지시문 수록
난후잡록..간직에서 물러난후 사적을 회상하여 기록한책
운암잡록..영의정에서 물러난후 생애를 회상하며수필형식으로
              기록한책
서애소초..임진왜란전 국왕에게 올린 건의문
도체찰사 교지..군의 작전을 조정 통제하라는 교지
광국공신 교서...1590년 종계변모의 공을 광국공신3등의                     상훈교서로 한석봉의 글씨이다
호성공신서훈교서,,임진왜란때 왕을 호종하고 수복에 공로로
                      호성2등공신으로 내린교서 ,한석봉의글씨
판중추부사교지..영의정에서 물러난후 한직에 있을 때                  내려진직첩

 박상용 11-10-11 01:24   
영의정 임명 교지부분에 년도수가 틀렸습니다.
안동하회마을 홈페이지에서도 그렇고 여기 홈페이지도 그렇고 역사 내용부분에 오타및 년도수가 틀린부분이 너무많습니다....형식적인 홈페이지보다 학생들이 보고 배울수있는 홈페이지가 될수있도록 노력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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