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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을 가지고있다. 2008-05-07 03:45:02  
  이름 : 하회촌지킴이      조회 : 3464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 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살아도 향기를 팔지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柳經百別又新枝(류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백번 꺽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겪어보니 병(病)에도 때가 있다. 득병유시(得病有時)요, 치병유시(治病有時)다. 한편의 시(詩)도 마찬가지다. 득시유시(得詩有時)요, 해시유시(解詩有時)다. 나는 기업체 회장 사무실이나 유서 깊은 집안을 방문하였을 때 벽에 걸려 있는 한문 액자나 병풍 글씨의 내용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취향이 여기에 나타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내용이 어려워 해석을 못하거나 출전(出典)을 알지 못해서 당황했던 적도 많다. 교보문고를 세운 고(故) 신용호 회장을 생전인 7년 전쯤에 처음 만났을 때였다. 이 양반이 식사 도중에 시(詩) 한 구절을 이야기 했다.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이요,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는 구절이었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구절을 애송하는 신 회장을 보고 필자는 속으로 '이 양반이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는 사실을 짐작하였다. 사업하는 사람은 간과 쓸개를 버리고 다녀야 할 텐데 어찌 이렇게 자존심 강한 시를 좋아할까 하는 의문도 아울러 들었다. 그때는 이 시의 작자나 또는 출전을 몰랐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 어느 한정식 집에 갔을 때 그 집의 병풍에 이 두 구절이 똑같이 쓰여 있었다. 이 구절이 상당히 유명한 대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그 작자가 누구인지, 나머지 구절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다.


 

득시(得詩)는 했지만 해시(解詩)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에 그 작자와 나머지 구절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자는 조선조의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이었다.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일 만큼 심금을 울리는 문장을 썼던 인물이다. '월도천휴여본질(月到千虧餘本質), 유경백별우신지(柳經百別又新枝)'가 나머지 두 구절이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100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 온다'는 의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 4개월 전에 쓴 휘호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백범도 좋아했던 내용이 바로 상촌이 지은 이 나머지 두 구절이다.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상촌 신흠(申欽):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냄,조선시대 4대 문장가로 일컬어 질 만큼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각종 의례문서 제작에도 참여 하였음.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짐.

작품으로는 <상촌집(象村集)>,<야언(夜言)>,<낙민루기(樂民樓記)>,등이있음.

신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간결하고 장중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필과 연관된

문한직(文翰職)을 겸했다,그러면서 대명(對明)외교문서의 작성,시문의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시대의 난관을 극복하며 인조대(代)에 와서는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왕조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다.문장에 있어서는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계곡 장유(谿谷 張維),

택당 이식(澤堂 李植)과 더불어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호칭되며 조선 4대 문장가로 넓리 알려졌으며,

한편 한문학의 정종(正宗)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젊었을때는 경당(敬堂)또는 백졸(百拙)이라 호를 지었고,어떤때는 남고 (南皐)라 부르기도 하고 현헌(玄軒)이라

바꿔 부르기도 했다,그러다가 김포 상두산(象豆山)아래 농장 생활을 할때는 상촌거사(象村去士)라는 호 하나를 사용했다.

만년에 들어서는 방옹(放翁)이라 일컫기도하고 유배 생활중에는 여암(旅菴)이라 편액을 걸기도 하였다.

신흠은 1566(병인년 명종21)1월 28일 한성부 장의동에서 태어났다,정숙한 덕과 훌융한 예의범절을 갖춘

어머니 은진송씨가 가슴속으로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꾸고 난 다음날이었다,태어나면서부터 신흠은 모습이

남 달랐는데,이마가 넓고 귀가 컷으며 눈은 샛별같았고 오른뺨에는 탄환 모양의 사마귀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노는것도 범상치 않았으며 몸 가짐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그는 부계와 모계 모두 사대부 가문으로 남 부럽지 않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일곱살 되던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의어 외조부인 의정부 좌참찬 추파 송기수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여덜살 때부터 외조부의 훈도를 받아 글 공부에 전념하여 10세 때에는 논어와이소(離騷)를,

13세 때에는 경서,사서,제자문집을,14세 때에는 천문,지리,율력,산수,의학,등을 두루설렵하고

유려하게 글을 잘 지어 명성이 드러났다.1581년 16세에 향시(鄕試)에 급제하고 20세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仕試),21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다.

 

학문에 전념한결과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관직에 나가서는 준엄한 이념과 행동을 보이면서

자기시대의 수많은 과제를 정면으로 훌융하게 수행했다.그래서 그는 관료로서 또는 정치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신흠이 살았던 시대는 혼란과격동의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계축옥사와 인조반정,정여립의 난과 이괄의 난 등 크고 작은

정치적인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그 사건들의 고비마다 신흠은 정치권의 중심에 있었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 사건들과 관련을 지니게도 되었다.그 결과 그는 삭탈관직,방축,유배등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고통을 세겨야 했다.그러나 그는 방축이나 유배의 생활에 동요되지 않았고

오히려 풍요한 마음을 경영하며 글로 부유한 세상을 맞이하였다.

 

 신흠의 문장 작법은 육경(六經)에 기초하고 있으며 어려서는 한퇴지를 좋아하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고문(古文)을 거의 모두 읽었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좌씨(左氏),사기(史記),장자(莊子),이소(離騷),예기(禮記),고악부(高樂府),선시(選詩),이백(李白),두보(杜甫)의 시 등 제가(諸家)의 글을 설렵하고 애송하면서 대가의 문체를 수명(修明)하였다.

그가 남긴 <상촌집>63권에는 한시2036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 작품은 문장4대가로서의 명성을 새겨주고 있는것이라 할수 있을것이다,한편 <청구영언>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는 한글시조 30편은 한시에 비해서 비록 적은 수이긴 하지만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여 수준높은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공적을 더욱 크게 인정받을 수 있을것이다.

 

 

출전 :문화관광부 홈페이지에서 발취

 

초목 류영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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