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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애선생연보 2012-04-14 22:48:37  
  이름 : 하회촌지킴이      조회 : 2307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연보

1542년(중종 37년) 10월 1일: 경북 의성현 사촌沙村리 外家에서 태어나다.(西林)

자(字) 이현(而見), 호(號)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

황해도 관찰사 입암 류중영공의 둘째 아들이고 선생의 외가는 의성현 사촌리로

외조부는 송은처사(松隱處士 김광수(金光粹)공이다.

1558년(명종 13년) 17세:

세종대왕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5대손 이경李坰(용궁현감,우참찬 趙士秀의 사위壻)공의 따님과 결혼했다.

1562년(명종 17년) 21세: 예안 도산에서 겸암선생과 함께 퇴계선생에게서 근사록近思錄을 전수 받았다.

퇴계선생은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此人天所生也/天之所出者'하여 서애선생이 장차 대성할 인물임을 예언했다.

1564년(명종 19년) 23세: 生員試 一等, 進士試 三等으로 급제하였다.

파산공巴山公,謙庵公과 더불어 해주 신광사에서 수개월 동안 공부하다.

1565년(명종 20년) 24세: 파산공,겸암공과 더불어 문헌서원(황해도 해주;최충 최유선 배향)에서 독서

1566년(명종 21년) 25세: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임명되었다.

1567년(명종 22년) 26세: 1월에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1569년(선조 2년) 28세: 사헌부감찰이 되어 성절사(상사 이후백)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 연경에 갔다.

1570년(선조 3년) 29세: 사가독서의 은전을 받았다. 9월에 사간원 정언,12월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72년(선조 5년) 31세: 병조좌랑겸홍문관수찬으로 임명되었다.

1573년(선조 6년) 32세: 입암공(선생의 父) 상喪을 경저京邸에서 당하다

1576년(선조 9년) 35세: 원지정사를 짓다. 12월에 홍문관부응교에 올랐다.

1577년(선조 10년) 36세: 1월에 의정부검상이 되고 이듬해까지 다시 두차례 홍문관부응교를 역임하였다.

1579년(선조 12년) 38세: 봄에 홍문관직제학이 되고, 7월에 부제학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580년(선조 13년) 39세: 선생이 노모(1512-1601, 69세)를 봉양코자 여러번 관직을 사양하였으므로

선조는 상주목사로 특명하여 노모를 모시도록 하였다.

우복 정경세, 월간 이전,창석 이준,사서 전식,가규 조익 諸公들을 제자로 양성하다.

1581년(선조 14년) 40세: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왕명으로 대학연의를 지어 올렸다.

1582년(선조 15년) 41세: 사간원대사헌이 되었다. 승정원 우부승지에서 도승지로 특진되었다.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왕명으로 황화집 서문을 지어 올렸다.

1583년(선조 16년) 42세: 1월에 회재 이언적선생의 구경연의九經衍義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10월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84년(선조 17년) 43세: 왕명으로 문산집 서문을 지어 올렸다.

 예조판서겸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간대제학이 되어 향약을 반포했다.

1585년(선조 18년) 44세: 왕명을 받아 정충록 발문을 지어 올렸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문집을 교정하고 그 발문을 지었다.

1586년(선조 19년) 45세: 겸암선생이 선산 인동 오태에 야은 길재선생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우다.

뒷면 기문記文은 예조판서 서애선생이 쓰다.

1587년(선조 20년) 46세: 3월에 퇴계집을 편차編次하였다.

1588년(선조 21년) 47세: 형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48세: 봄에 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7월 25일 정경부인이씨가 별세했다. 향년 48세. 10월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49세: 3월 황윤길 김성일 허성 등을 통신사로 보내게 하여 왜국의 정세를 살펴 오게 했다.

4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갈 때 노모의 의복을 하사받았다. 5월 우의정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겸했다.

명나라에 그릇(잘못) 기재된 조선왕조宗系를 바로 잡은 공으로 광국공신풍원부원군으로 서훈되었다.

1591년(선조 24년) 50세: 2월 좌의정에 오르고 역시 이조판서를 겸했다.

선생은 조정의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왜국이 침공할 조짐을 명나라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7월 왜란에 대비하서 장재將材 를 천거하여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로,

형조정랑 권율을 광주목사로 임명케 했다.

전부터 써오던 진관제鎭管制를 다시 설치할 것을 건의했으나 반대에 부딪쳐 실현되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년) 51세: 3월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兵書를 저술하여

이순신장군에게 보내 주고 實戰에 활용케 했다.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특명에 의해 병조판서를 겸임했고,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도록 계청啓請했다.

근왕애통교서勤王哀痛敎書를 널리 반포하고 왕자들을 각도에 파견하여 근왕병을 소집하도록 계청했다.

경상도우병사右兵使 김성일을 사면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5월 왜병의 도성침입이 임박하여 王을 모시고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모함으로 그날로 파직되었다.

 동파역東坡驛에서 "사태가 위급하면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가자"는 조정朝廷의 공론에

"대가大駕(임금의 가마)가 일보라도 우리 땅을 넘어서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

(大駕離東土一步地 朝鮮非我有也)"라고 극력 반대하여 국내 항전태세를 굳혔다.

6월 豊原府院君으로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평양을 지킬 것을 주장했으나 윤허되지 않았으며 함경도로 들어가자는 공론을 크게 반대하여

의주쪽으로 파천토록 하였다. 평양까지 침공한 왜군의 전방을 막고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하는 유격전을 지령했다.

 9월 군수보급과 명장明將 접대의 임무를 맡았다.

건주위建州衛(청태조 누루하치)가 구원병을 보내 주겠다는 제의를 하자 거절하도록 계청했다.

12월 평안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왜군의 첩자 김순량 등을 사로잡아 처단하여 군기누설을 막았다.

명장 이여송과 안주에서 회견하고 평양탈환을 협의했다.

1593년(선조26년) 52세: 1월 명군과 힘을 합쳐 평양을 탈환했다.

호남에서 수집한 곡물로 기민飢民을 구제할 것을 계청하여 실시했다.

2월 임진강으로 칡으로 다리(부교浮橋)를 놓아 大軍을 도강시켰다.

이어 충청 전라 경상 3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5월 선생은 이여송의 대왜對倭강화교섭에 항의했으나 명군明軍은 일방적으로 정전停戰하여

왜군이 철수하였으므로 명군과 함께 한양을 수복했다.

 왜군을 추격하자는 선생의 주장을 명장明將이 불응함에

"명나라는 믿을 수 없으니 자주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자"고 건의하여

중앙군제中央軍制인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장정壯丁을 모집했으며 조총과 대포 등 화력을 증강했다.

7월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한 군사교련을 실시하도록 건의했다.

8월 압록강 연안의 中江에서 우리나라의 소금,은,철,면포綿布 등과 중국의 곡물을 교역케 하여 식량을 확보했다.

10월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되고 훈련도감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겸했다.

11월 조선을 더 구원할 뜻이 없는 명은 사신 사헌司憲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칠 것만을 바라는 선조를 퇴위시키고

우리 국토의 직접통치를 강요하는 국서國書를 보내 왔으나 선생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물리쳤다.

선생의 충성심과 지략에 감탄한 사헌은 선생이 "나라를 다시 이룩한 공功(山河再造之功)이 있다"고

선조에게 극구 칭찬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국사를 전관토록 하라는 말까지 했다.

1594년(선조27년) 53세: 3월 진관법鎭管法을 다시 쓰기로 하여 국민개병제도國民皆兵制度를 확립했다.

공물貢物을 미곡으로 대신하여 바치도록 하고식염을 증산시켜 이를 전매제專賣制로 군량미를 확보하게 했다.

민심의 안정이 난국을 수습하는 기본임을 역설하여 흐트러진 국민들의 생활을 돌보는

안집도감安集都監을 설치하고 그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었다.

5월 지방관의 근무상황을 조사하여 해이해진 관기官紀를 쇄신하도록 주청했다.

 6월 대신을 명나라로 보내어 왜군의 동정을 알리고 대책을 협의하도록 건의했다.

'戰守機宜전수기의 11조'을 올렸다. 7월 연병鍊兵사무를 병조에서 전담토록 했다.

문벌,신분,출신지의 차별없이 수학,총포, 무기,광업鑛業,화약,제엄 등에 유능한 인재를 널리 등용할 것을 건의했다.

 1595년(선조 28년) 54세: 1월 한강유역에 요새要塞를 구축하고

둔전병屯田兵(평상시는 농사를 짓고 전시戰時 에만 동원되는 병사)제도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소疏를 올려 기축(1589)년 정여립의 옥사에 억울하게 죽은 이의 오명을 씻어줄 것을 건의했다.

10월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道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4도순찰사巡察使에 군병을 교련하도록 논시했다.

11월 관영제철장官營製鐵場을 설치하여 대포와 조총을 주조하도록 했다.

남한산성을 순시하고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에게 성을 쌓고 창고를 설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596년(선조 29년) 55세: 1월 군병을 훈련시키는 규칙을 제정하여 각도에 반포토록 했다.

2월 후금後金 건주위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변北邊의 방위를 강화할 것을

평안 함경 양도兩道 순변사巡邊使에게 명했다. 9월 이순신을 죄주자는 의견에 반대하여 사직원을 올렸다.

11월 청야책淸野策 을 써서 왜적의 재침再侵에 대비케 했다.

1597년(선조 30년) 56세: 3월 이순신장군이 모함으로 파면될 때 그 부당함을 극력 진언했으나 윤허되지 않아,

그를 천거한 책임을 지고 재차 사직원을 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0월 왕명으로 경기 충청지방을 순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제장諸將들의 공과功過를 살폈다.

1598년(선조 31년) 57세: 여러번 사직원을 내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7월 명나라 정응태丁應泰의 무주사건誣奏事件에 대한 진주사陳奏使를 고사固辭했다.

10월 북인들의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면당했다.(19일 이 날 이순신장군이 戰死)

12월 모든 관작官爵을 삭탈당했다.

1599년(선조 32년) 58세: 2월 향리인 하회로 돌아왔다.

1600년(선조 33년) 59세: 11월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았다.

1602년(선조 35년) 61세: 4월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겸근청백록兼謹淸白錄에 이름이 올랐다.

 영모록永慕錄을 지었다.

1604년(선조 37년) 63세: 7월 징비록懲毖錄(혼날 징,삼갈 비/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날에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삼가하라는 잠언서) 저술을 마쳤다.

다시 부원군府院君이 되고 호성공신호扈聖功臣號를 하사받았다.

9월 충훈부에서 공신인 선생의 초상화를 그릴 화사畵師를 보냈으나,

 나라에 공이 없다고 사양하여 그대로 돌려 보냈다.

1605년(선조 38년) 64세: 3월 봉조하록奉朝賀錄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07년(선조 40년) 66세: 2월 선생의 병보病報에 접한 선조는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환을 살피게 했다.

5월 6일 향리(학가산 아래 서미리) 농환재초당弄丸齋草堂에서 별세했다.

부음訃音이 서울에 전해지자 항곡巷哭이 일어났으며 천여千餘의 도민都民이 선생의 옛집터에 모여 통곡하였고

조정에서도 3일간 공휴公休를 선포하고 상인들은 자진하여 4일간 철시하였다.

풍산현 수동 豊山縣 壽洞의 남향南向한 땅에 예장禮葬했는데 예조좌랑으로 하여금 치제致祭케 했다.

1614년(광해군 6년) : 병산서원에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고

그 후 상주 도남서원 군위 남계서원 안동 여강서원(호계서원) 예천 용궁 삼강서원 의성 빙산서원(빙계서원)

등에도 봉안되었다. 1627년(인조 5년) : 문충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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