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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연서당 2010-01-06 14:59:07  
  이름 : 하회촌지킴이      조회 : 4674      


 









 玉淵書堂記

 余旣作遠志精舍, (여기작원지정사)나는 이미 원지정사를 지어 놓았으나,

猶恨其村墟近, 未燁幽期,(유한기촌허근 미협유기)마을이 멀지 않아, 그윽한 맛을 누리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渡北潭, 於石崖東, (도북담 어석애동)이에 북쪽으로 沼를 건너, 돌벼랑 동쪽으로,

得異處焉,(득이처언)기이한 터를 잡았는데,


前읍湖光, (전읍호광)앞으로는 호수의풍광을 지녔고,


 後負高阜,(후부고부) 뒤로는 높다란 언덕에 기대었으며,


丹壁峙其右,(담벽치기우) 오른쪽에는 붉은 벼랑이 치솟고,

白沙榮其左,(백사연기좌) 왼쪽으로는 흰모래가 띠를 두른듯 했다

南望,(남망)남쪽으로 바라보면, 則群峯錯立,(칙군봉착립) 뭇 봉우리들이 들쑥날쑥 섞여 서서,

拱읍如畵,(공읍여화) 마치 두 손을 맞잡고 읍을하는 형상은 한폭의 그림이요.


漁村數鮎,(어촌수점) 어촌 두어 집이,隱映烟樹間.(은영연수간) 나무숲 사이 강물에 어리어 아른 거린다.


花山自北而南, (화산자북이남)화산은 북쪽에서 달려오다가 남쪽의.


 隔江相對,(격강상대) 강을 대하고 멈추어 섰다.


每月出東峯, (매월출동봉)달이 동쪽의 산 봉우리에서 떠 오를 때,


寒影倒垂,(항영도수)차가운 산그림자는,


半浸湖水,(반침호수) 반쯤 강물위에 거꾸로 드리워지는데,


纖波不起, (섬파불기)물결 한점 일지않는 잔잔한 강물에,


金壁相涵, (금벽상합)금빛 달 그림자까지 담겨진듯한,


殊可玩也. (수가완야)관경이야 말로 매우 볼만한 것이었다.


地去人烟, 不甚遠, 지거인연불심원이 곳이 인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나,


而前阻深潭, (이전조심담)앞에 깊은 (沼)쏘가 있어,


人欲至者, (인욕지자)사람이 오고자 해도, 非舟莫通,(비주막통)배가 없으면 올 수가 없다.


舟艤北岸, (주의북안)그래서 배를 북쪽 기슭에 메어 두면,


則客來坐沙中,(칙객내좌사중) 사람들이 와서 모래 사장에 앉아,


 招呼無應者,(초호무응자) 이쪽을 향해 소리쳐 부르다가 오래도록 대답이 없으면,

 

良久乃去, (양구내거)스스로 돌아가곤 하였으니,


亦遁世幽棲之一助也.(역둔세유서지일조야) 이 또한 세상을 피해 그윽히 들어앉아 사는 일에

 한가지 도움이 된다.


於是, 余心樂之,(어시,여심락지)나는 이것을, 마음 속으로 좋아하여,

欲作小宇,(욕작소우)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爲靜居終老之所.(위정거종로지소) 늙도록 조용히 거처할 곳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願家貧無計, (원가빈무계)살피건데 집이 가난하여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有山僧誕弘者, (유산승탄홍자)마침 산승탄홍이란 자가,



自薦幹其役,(자천간기역)그 건축을 주관하고, 資以粟帛, (자이속백)곡식과 베를내어 놓으니,


自丙子始, 越十年丙戌粗成, (자병자시,월십년병술조성)일을 시작한 병자년(선조 9 1576)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병술년(선조 19 1586), 可棲息.(가서식) 겨우깃들고 쉴만하게 되었다.


其制, 爲堂者二間, (기제,위당자이간)집 구조는 당2칸은 名曰瞰綠, 감록헌이라 부르고,



取王羲之'仰眺碧天際, 俯瞰綠水외'之語也.(취황의지'앙조벽천제,부감록수외'지어야,)

황의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 물구비 바라보네" 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고.


堂之東,爲燕居之室二間,(당지동,위연거지실이간)이 당에 붙어 있는 편히 쉴 수 있는 방 2칸 이름을,


名曰洗心(명왈세심)洗心齋라 지었으니,


取易繫辭中語, (취역계사중어)주역계사편중


 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의혹종사어사,이서기만일이)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又齋在北者三間,(우재재북자삼간)또 북쪽 집3칸은,


 以舍守僧, 取禪家說, 名曰玩寂,(이사수승) 이 집을 지키는 중을 위해,


取禪家說, 名曰玩寂(취선가설,명왈완적)선가의 말을 따서, 완적재라 하였다.


爲齋二間,(동위재이간)동향집 2칸은,


以待朋友之來訪者,名遠樂,(이대붕우지래방자,명원락)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원락재라 하였는데,


'自遠樂乎'之語.(취'자원락호'지어)이 명칭은 論語중에서 따온것이다.

由齋西出爲小軒二間,(유재서출위소헌이간)이재의 서쪽으로낸 조그마한 마루 2칸은


 與洗心齋相比, 名曰愛吾(여세심재상비,명왈애오)세심재와 이웃하고 있기에, 愛吾軒이라 하였다.


 取淵明'吾亦愛吾廬'之語(취연명'오역애오려'지어)


이 명칭은 도연명(陶淵明)의시<讀山海經>에서 뭇새들도 깃들둥지를 찾아 기뻐하듯이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는 시어에서 따온것이다.


合而扁之,曰玉淵書堂(합이편지,왈옥연서당) 이 모두를 합하여 편액하기를, 玉淵書堂이라 하였다.


盖江水至此 匯爲深潭,(합강수지차 회위심담) 대개 강물이 흐르다가 이 곳에 이르러서는,깊은 沼가 되었고,

其色潔淨,(기색결정)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 如玉故名.(여옥고명)옥과 같은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人苟體其意,(인구체기의) 사람이 진실로 그 뜻을 본 받고자 한다면,


則玉之潔, 淵之澄,(칙옥지결,연지증)옥의 깨끗함과, 沼의 맑음이란,


皆君子之所貴乎道者也.(개군자지소귀호도자야) 이 모두가 군자가 귀하게 여길 道인 것이다.


余嘗觀古人之言曰(여상관고인지언왈)내가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살펴보건데,


"人生貴適意,"("인생귀적의")인생이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한 것이지,


 "富貴何爲,"("부귀하위") 부귀가 무슨 귀한 것이 되리요 하였거니와,


余以鄙拙,(여이비졸) 내가 옹졸하고 부족하여서,

素無行世之願,(소무행세지원) 평소 행세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譬如미鹿之性, (비여미록지성)사슴, 고라니 같은내 천성은,


 山野其適, 非城市間物, (산야기적,비성시간물)산야에 삶이 알맞지,시정간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


 而中年妄出宦途, (이중년망출이도)중년에 망령되게도벼슬길에 나가,

汨沒聲利地場, 二十餘年矣. (골몰성리지장,이십여년의)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여년이 되었다.

擧足搖手,(거족요수)손발 움직일 때마다,


 動成駭觸,(동성해촉)걸핏하면 해괴한 일만 저질렀으니,

當其時,大悶無聊,(당기시,대민무료)그 당시에, 크게 답답해했었고,슬퍼하면서,

未嘗不창然思茂林豊草之爲樂也. (미상불창연사무림풍초지위락야)이 곳의 무성한 숲속을 그리워하며

 즐거움을 삼았던 것이다.


今幸蒙恩,(금행몽은) 지금은 임금의 은혜로,解綬南歸,(해수남귀)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 올 수 있었으니,

軒曼之榮過耳 (헌만지영과이)정말 벼슬 따위와 같은 영화란 이미 지난일이었다,


鳥音而日丘一壑(조음이일구일학)새소리 들리는 언덕과 골짜기의

 樂意方深.(락의방심) 즐거움이 깊어 가는 이 때에.


是時, 而吾堂適成,(시시,이오당적성) 마침, 나의 집이 완성되었다.



 將杜門却掃, 潛深伏奧(장두문각소,잠심복오) 문을 닫고, 찾아오는이도 사양한채,


면仰乎一室之內,(면앙호일실지내)방안에 깊이 들어 박혀 지내며,

放浪乎山谿之間,(방랑호산계 지간) 산과 계곡을이리저리 거닐기도 하며,

 圖書,足以供玩索之樂,(도서족이공완삭지락) 때론 서적들로 취미를 붙여, 그 의미를 궁구하기도 하고,


疏려, 足以忘芻환之미(소려,족이망추환지미) 성긴 밥이나,맛있는 음식의 기름짐을 잊기에 족하니,


 佳辰美景,(가진미경)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에,情朋偶集,(정붕우집) 정겨운 벗들이 우연히모여들면,

則輿之,窮回溪,(칙여지궁회계)그들과 더불어,굽이진 계곡을 거닐기도 하며,


坐巖石, (좌암석)바위에 앉아 望靑天,(망청천)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歌白雲,(가백운)흰구름을 읊기도 하면서,

蕩押魚鳥, (탕압어조)물고기 새들과 함께 어울려 호탕히 지내노라면,


皆足以自樂而忘憂.(개족이자락이망우)이 모든 것이마음을 즐겁게 하여 근심을 잊는다.

嗚呼, 斯亦人生適意之大者,(오호,사역인생적의지대자) ! 이것 또한“인생이 스스로의 뜻에 맞는 큰 것인 즉

外慕何爲,(외모하위) 밖으로 달리 그 무엇을 그리워할 것인가


懼斯言之不固,(구사언지불고) 내 이 말을 굳게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 한 나머지,


聊書壁而自警.(요서벽이자경) 벽에다가 글로써 붙여 놓고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하고져 하노라.



丙戌季夏(병술계하) 丙戌年(1586) 늦 여름


主人 西厓居士記(주인 서애거사 적다)


 

甲申年  2004. 3 7


庭齋에서 십삼대손  柳 永 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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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연서당 안내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임진왜란의 전후사정을 기록한 징비록(국보132호)을

셨던 역사의현장 입니다,

1586년(선조19년)에 서애 선생께서 45세때 쓰신옥연서당기를 통하여 선생의 진정한 

 

인간상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선생은 1598년 임진왜란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해 7월 정웅태 무주(誣奏)사건에 대한 진주사(陳奏使)를 고사(固辭)했다하여 


10월19일 북인 문홍도(정인홍의문인)에 의한 탄핵(彈劾)으로 영의정을 파면당했으며


(이날 이순신장군 전사) 그해12월 5일 모든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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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厓集 戊戌冬 罷官歸田 到渡迷崍 下馬望京山四拜而行 蓋過此則不復見京山故也,P32

 (서애집 무술동 파관귀전 도도미래 하마망경산사배이행 개과차칙불복견경산고야)


파직되는 바로 다음날 서울을 떠나 사흘째 되는 1598년11월22일에는 도미진 나루에



이르럿다.말에서 내려 삼각산을 바라보고 네번의 절을 올린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는 서울의 산을 볼수없기 때문이다.이곳에서 詩 한수를 지었다.


 田園歸路三千里(전원귀로삼천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삼천 리인데,


유幄深恩四十年(유악심은사십년) 주상모신 사십년 은총도 두터웠오,



立馬渡迷回首望(립마도미회수망) 도미진 나루에서 말세우고 뒤 돌아보니,


 終南山色故依然(종남산색고의연) 남산의 빛과 모습은 옛 그대로 일세.



고향가는 길은 멀기만 한데, 마음은 급하고 차마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는다.삼천리의



三은 많음을 나타내는 숫자이고,四十年은 임금님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나타낸 말이다.


내가 없어도 객관적 사실로 남은 자연과,버려진 나의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다른말을할 듯 하면서 끝을 맺어 버렸다.언외의 餘韻美(여운미)를 살린것이다.


국토회복의 문제 유학중흥의 문제 등에 전력을 경주하였으나 그 종말에는 


북인들에 구무(構誣)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단양땅 운암장 수운정에서

잠시거처하신후 1599년(선조32년) 2월 16일 하회로 돌아오셔서 옥연서당에서 


거쳐 하셨습니다.1600년(선조33년) 11월 59세때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았으나


이후 출사하시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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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厓集 p49   看竹門



     細雨春江上(세우춘강상)          봄 되어 강위엔 보슬비 내리고,

前山淡將夕(전산담장석)          앞산도 아슴푸레 저무는구나,

     不見意中人(불견의중인)           마음에 담은 사람 보이질 않고,

梅花自開落(매화자개락)           매화만 절로 피었다 지네.



옥연정사 에서 한거자락 하는 심경을 드러낸 詩




1602년(선조35년) 4월 61세때 청백리로 뽑혀 염근청백록에 기록되었으며 


영모록을 지었으며 1604년(선조37년) 7월에 이곳 원락재에 거처하시며



은퇴이후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당신이 체험한 국란을 되돌아보며


모든기록을 정리하여 징비록(懲毖錄)을 완성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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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선생이 임진왜란때의 상황을 벼슬을 떠나 귀향한 후에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징비록(懲毖錄)」으로 하였다.




다시 부원군이 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호를 하사(下賜)받았으며 9월에 충훈부에서 



공신인 선생의 초상화를 그릴 화사(畵師)를 보내왔으나 


"후세에 전할만한 가치가있는 마음을 소유한 존재라면






형체는 자연스럽게 전해질 것이므로

본인이 초상화를 굳이 남기려 애쓸 필요가 없다"

고 하시며 거절하여 영정이 없습니다.



1605년 1월에 지행합일설을 짓고 3월 봉조하녹(奉朝賀綠)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4월 제왕기년록(帝王紀年錄)를짓고 그달에 큰 아들이 

죽고 나서 보는 것마다 쓸쓸하고 슬퍼서 마음만 상할 뿐이어서 학가산 기슭에 있는

서미동 북쪽 석벽아래에 중대사 노승에 도움을 받아 초당을 지으시고

농환재(弄丸齋)라 명명하시고 거처 하시다가 1607년(선조40년) 5월 6일

 66세에 이르러 운명하셨습니다.부음(訃音)이 서울에 전해지자 1000여 시민이

선생의 옛집터에 모여서 통곡하였고 조정에서는 3일간 공휴로 선포하고 상인들은 

자진하여4일간  철시했다 하며 풍산읍 수동 남향한 땅에 예장(禮葬)했는데

선조께서 예조좌랑으로 하여금 치제(致祭)케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614년(광해군6년) 병산서원에 선생의 위판이 봉안되고 그후 남계서원,려강서원,

삼강서원, 도남서원, 빙산서원 등에도 봉안되었습니다. 

1627년(인조5년) 문충이란 시호가 하사되었습니다.


























   西厓集 年譜 p525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연보

1542년(중종 37년) 10월 1일: 경북 의성현 사촌沙村리 外家에서 태어나다.(西林)
자(字) 이현(而見), 호(號)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
황해도 관찰사 입암 류중영공의 둘째 아들이고 선생의 외가는 의성현 사촌리로
외조부는 송은처사(松隱處士 김광수(金光粹)공이다.




1558년(명종 13년) 17세:
세종대왕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5대손 이경李坰(용궁현감,우참찬 趙士秀의 사위壻)공의 따님과 결혼했다.

1562년(명종 17년) 21세: 예안 도산에서 겸암선생과 함께 퇴계선생에게서 근사록近思錄을 전수 받았다.
퇴계선생은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此人天所生也/天之所出者'하여 서애선생이 장차 대성할 인물임을 예언했다.

1564년(명종 19년) 23세: 生員試 一等, 進士試 三等으로 급제하였다.
파산공巴山公,謙庵公과 더불어 해주 신광사에서 수개월 동안 공부하다.
1565년(명종 20년) 24세: 파산공,겸암공과 더불어 문헌서원(황해도 해주;최충 최유선 배향)에서 독서
1566년(명종 21년) 25세: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임명되었다.
1567년(명종 22년) 26세: 1월에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1569년(선조 2년) 28세: 사헌부감찰이 되어 성절사(상사 이후백)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 연경에 갔다.
1570년(선조 3년) 29세: 사가독서의 은전을 받았다. 9월에 사간원 정언,12월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72년(선조 5년) 31세: 병조좌랑겸홍문관수찬으로 임명되었다.
1573년(선조 6년) 32세: 입암공(선생의 父) 상喪을 경저京邸에서 당하다
1576년(선조 9년) 35세: 원지정사를 짓다. 12월에 홍문관부응교에 올랐다.
1577년(선조 10년) 36세: 1월에 의정부검상이 되고 이듬해까지 다시 두차례 홍문관부응교를 역임하였다.
1579년(선조 12년) 38세: 봄에 홍문관직제학이 되고, 7월에 부제학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580년(선조 13년) 39세: 선생이 노모(1512-1601, 69세)를 봉양코자 여러번 관직을 사양하였으므로
선조는 상주목사로 특명하여 노모를 모시도록 하였다.
우복 정경세, 월간 이전,창석 이준,사서 전식,가규 조익 諸公들을 제자로 양성하다.
1581년(선조 14년) 40세: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왕명으로 대학연의를 지어 올렸다.
1582년(선조 15년) 41세: 사간원대사헌이 되었다. 승정원 우부승지에서 도승지로 특진되었다.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왕명으로 황화집 서문을 지어 올렸다.
1583년(선조 16년) 42세: 1월에 회재 이언적선생의 구경연의九經衍義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10월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84년(선조 17년) 43세: 왕명으로 문산집 서문을 지어 올렸다.
 
예조판서겸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간대제학이 되어 향약을 반포했다.
1585년(선조 18년) 44세: 왕명을 받아 정충록 발문을 지어 올렸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문집을 교정하고 그 발문을 지었다.
1586년(선조 19년) 45세: 겸암선생이 선산 인동 오태에 야은 길재선생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우다.
뒷면 기문記文은 예조판서 서애선생이 쓰다.
1587년(선조 20년) 46세: 3월에 퇴계집을 편차編次하였다.
1588년(선조 21년) 47세: 형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48세: 봄에 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7월 25일 정경부인이씨가 별세했다. 향년 48세. 10월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49세: 3월 황윤길 김성일 허성 등을 통신사로 보내게 하여 왜국의 정세를 살펴 오게 했다.
4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갈 때 노모의 의복을 하사받았다. 5월 우의정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겸했다.
명나라에 그릇(잘못) 기재된 조선왕조宗系를 바로 잡은 공으로 광국공신풍원부원군으로 서훈되었다.
1591년(선조 24년) 50세: 2월 좌의정에 오르고 역시 이조판서를 겸했다.
선생은 조정의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왜국이 침공할 조짐을 명나라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7월 왜란에 대비하서 장재將材 를 천거하여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로,
형조정랑 권율을 광주목사로 임명케 했다.
전부터 써오던 진관제鎭管制를 다시 설치할 것을 건의했으나 반대에 부딪쳐 실현되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년) 51세: 3월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兵書를 저술하여
이순신장군에게 보내 주고 實戰에 활용케 했다.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특명에 의해 병조판서를 겸임했고,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도록 계청啓請했다.
근왕애통교서勤王哀痛敎書를 널리 반포하고 왕자들을 각도에 파견하여 근왕병을 소집하도록 계청했다.
경상도우병사右兵使 김성일을 사면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5월 왜병의 도성침입이 임박하여 王을 모시고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모함으로 그날로 파직되었다,
 동파역東坡驛에서 "사태가 위급하면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가자"는 조정朝廷의 공론에
"대가大駕(임금의 가마)가 일보라도 우리 땅을 넘어서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
(大駕離東土一步地 朝鮮非我有也)"라고 극력 반대하여 국내 항전태세를 굳혔다.
6월 豊原府院君으로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평양을 지킬 것을 주장했으나 윤허되지 않았으며 함경도로 들어가자는 공론을 크게 반대하여
의주쪽으로 파천토록 하였다. 평양까지 침공한 왜군의 전방을 막고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하는 유격전을 지령했다.
 9월 군수보급과 명장明將 접대의 임무를 맡았다.
건주위建州衛(청태조 누루하치)가 구원병을 보내 주겠다는 제의를 하자 거절하도록 계청했다.
12월 평안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왜군의 첩자 김순량 등을 사로잡아 처단하여 군기누설을 막았다.
명장 이여송과 안주에서 회견하고 평양탈환을 협의했다.
1593년(선조26년) 52세: 1월 명군과 힘을 합쳐 평양을 탈환했다.
호남에서 수집한 곡물로 기민飢民을 구제할 것을 계청하여 실시했다.
2월 임진강으로 칡으로 다리(부교浮橋)를 놓아 大軍을 도강시켰다.
이어 충청 전라 경상 3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5월 선생은 이여송의 대왜對倭강화교섭에 항의했으나 명군明軍은 일방적으로 정전停戰하여
왜군이 철수하였으므로 명군과 함께 한양을 수복했다.
 왜군을 추격하자는 선생의 주장을 명장明將이 불응함에
"명나라는 믿을 수 없으니 자주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자"고 건의하여
중앙군제中央軍制인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장정壯丁을 모집했으며 조총과 대포 등 화력을 증강했다.
7월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한 군사교련을 실시하도록 건의했다.
8월 압록강 연안의 中江에서 우리나라의 소금,은,철,면포綿布 등과 중국의 곡물을 교역케 하여 식량을 확보했다.
10월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되고 훈련도감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겸했다.
11월 조선을 더 구원할 뜻이 없는 명은 사신 사헌司憲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칠 것만을 바라는 선조를 퇴위시키고
우리 국토의 직접통치를 강요하는 국서國書를 보내 왔으나 선생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물리쳤다.
선생의 충성심과 지략에 감탄한 사헌은 선생이 "나라를 다시 이룩한 공功(山河再造之功)이 있다"고
선조에게 극구 칭찬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국사를 전관토록 하라는 말까지 했다.
1594년(선조27년) 53세: 3월 진관법鎭管法을 다시 쓰기로 하여 국민개병제도國民皆兵制度를 확립했다.
공물貢物을 미곡으로 대신하여 바치도록 하고식염을 증산시켜 이를 전매제專賣制로 군량미를 확보하게 했다.
민심의 안정이 난국을 수습하는 기본임을 역설하여 흐트러진 국민들의 생활을 돌보는
안집도감安集都監을 설치하고 그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었다.
5월 지방관의 근무상황을 조사하여 해이해진 관기官紀를 쇄신하도록 주청했다.
 6월 대신을 명나라로 보내어 왜군의 동정을 알리고 대책을 협의하도록 건의했다.
'戰守機宜전수기의 11조'을 올렸다. 7월 연병鍊兵사무를 병조에서 전담토록 했다.
문벌,신분,출신지의 차별없이 수학,총포, 무기,광업鑛業,화약,제엄 등에 유능한 인재를 널리 등용할 것을 건의했다.
 1595년(선조 28년) 54세: 1월 한강유역에 요새要塞를 구축하고
둔전병屯田兵(평상시는 농사를 짓고 전시戰時 에만 동원되는 병사)제도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소疏를 올려 기축(1589)년 정여립의 옥사에 억울하게 죽은 이의 오명을 씻어줄 것을 건의했다.
10월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道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4도순찰사巡察使에 군병을 교련하도록 논시했다.
11월 관영제철장官營製鐵場을 설치하여 대포와 조총을 주조하도록 했다.
남한산성을 순시하고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에게 성을 쌓고 창고를 설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596년(선조 29년) 55세: 1월 군병을 훈련시키는 규칙을 제정하여 각도에 반포토록 했다.
2월 후금後金 건주위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변北邊의 방위를 강화할 것을
평안 함경 양도兩道 순변사巡邊使에게 명했다. 9월 이순신을 죄주자는 의견에 반대하여 사직원을 올렸다.
11월 청야책淸野策 을 써서 왜적의 재침再侵에 대비케 했다.
1597년(선조 30년) 56세: 3월 이순신장군이 모함으로 파면될 때 그 부당함을 극력 진언했으나 윤허되지 않아,
그를 천거한 책임을 지고 재차 사직원을 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0월 왕명으로 경기 충청지방을 순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제장諸將들의 공과功過를 살폈다.
1598년(선조 31년) 57세: 여러번 사직원을 내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7월 명나라 정응태丁應泰의 무주사건誣奏事件에 대한 진주사陳奏使를 고사固辭했다.
10월 북인들의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면당했다.(19일 이 날 이순신장군이 戰死)
12월 모든 관작官爵을 삭탈당했다.
1599년(선조 32년) 58세: 2월 향리인 하회로 돌아왔다.
1600년(선조 33년) 59세: 11월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았다.
1602년(선조 35년) 61세: 4월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겸근청백록兼謹淸白錄에 이름이 올랐다.
 
영모록永慕錄을 지었다.
1604년(선조 37년) 63세: 7월 징비록懲毖錄(혼날 징,삼갈 비/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날에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삼가하라는 잠언서) 저술을 마쳤다.
다시 부원군府院君이 되고 호성공신호扈聖功臣號를 하사받았다.
9월 충훈부에서 공신인 선생의 초상화를 그릴 화사畵師를 보냈으나,
나라에 공이 없다고 사양하여 그대로 돌려 보냈다.
1605년(선조 38년) 64세: 3월 봉조하록奉朝賀錄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07년(선조 40년) 66세: 2월 선생의 병보病報에 접한 선조는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환을 살피게 했다.
5월 6일 향리(학가산 아래 서미리) 농환재초당弄丸齋草堂에서 별세했다.
부음訃音이 서울에 전해지자 항곡巷哭이 일어났으며 천여千餘의 도민都民이 선생의 옛집터에 모여 통곡하였고
조정에서도 3일간 공휴公休를 선포하고 상인들은 자진하여 4일간 철시하였다.
풍산현 수동 豊山縣 壽洞의 남향南向한 땅에 예장禮葬했는데 예조좌랑으로 하여금 치제致祭케 했다.
1614년(광해군 6년) : 병산서원에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고
그 후 상주 도남서원 군위 남계서원 안동 여강서원(호계서원) 예천 용궁 삼강서원 의성 빙산서원(빙계서원)
등에도 봉안되었다. 1627년(인조 5년) : 문충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蒙恩給職牒 (몽은급직첩)        59세때 은총을 입어 직첩을 부여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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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竹窓寒雪夜蕭蕭(죽창한설야소소)        댓살 창에 찬 눈 내려 쓸쓸한 밤에,









千里楓宸夢裏謠(천리풍신몽리요)        천 리 궁궐은 꿈에서도 멀더니만,








     白首縱霑新雨露(백수종점신우로)          늙어 비록 새로이 은총 입었으나









     豈宜重誤聖明朝(기의중오성명조)          어찌 밝은 조정을 거듭 그르칠까.










대나무가 우거진 창가에 잔설이 내린다.눈이 대나무 잎을건드리면서 눈 내리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온다,시각적 심상과 청각적 심상이 복합적으로 형상화되어









고독한 심정이 표현되어있다,









1598년일본과의 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관직이 삭탈(削奪)되었다.









그런데 1600년 11월(선조33년)에 주상의 부름이 내려온 것이다,다시 직첩을 돌려받으며









 詩를지어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백발의 나이가되어 주상의 은총을 다시입어









감격스러울 뿐이다,그러나 내심으로는 내내 걱정스럽기만하다,









성스러운 조정을 다시 더럽히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된다.









다시 직첩을 돌려받고 그해4월에 맏아들이 세상을 뜨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보는것 마다 쓸쓸하여 하회를 떠나 학가산 기슭 서미동 석벽아래









삼간초옥 농환재를 지으시고 거처하시게 됩니다.











               奇答兒輩(기답아배) 자녀들에게 보넨편지

















         吾自今年(오자금년)







           나는 요즘에 와서








         不樂在河廻(불락재하회) 








           하회동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않는데








         蓋擧目無非愁조故也(개거목무비수조고야)







           그것은 보는 것마다 쓸쓸하고 슬퍼서 마음만 상할 뿐이다.








         初欲往軍威(초욕왕군위)








           처음에는 군위현으로 가볼까 하였으나








         亦非十分地(역비십분지)








           그곳도 아주 흡족한 곳은 못되더구나








         玆欲於鶴駕山麓(자욕어학가산록)








           이제는 학가산 기슭에 있는








         中臺玆坡等向陽處(중대자파등향양처)







           마을 가운데 양지바른 언덕에















         得一安靜臨溪處(득일안정림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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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정사
겸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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